예술과 언어를 담아내는 몇 개의 자아
정재연
변화
유달리 추운 이번 겨울, 오늘도 새로운 아침을 맞이한다. 2025년을 마주하고 며칠 동안 고민한다. 그리고 컴퓨터에 앞에 앉는다. 새로운 브라우저 창을 열고, 또 한참 동안을 고민한다. 내가 찾고 있는 희망은 무엇일까? 내가 찾고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내가 찾는 눈부신 희망은 눈이 부실 정도로 나를 반짝이고, 아름답게 해주는 것일까? 그런 헛된 희망을 품고 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다. “아, 맞다.” 그러다가 작년에 했던 일을 생각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할까. 나는 무엇에 집중하는 것일까. 내가 꿈꾸는 미래는 어떤 모습이지. 아직도 나는 무언가를 쫓는 사람이구나. 어지러운 세상일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지금 현시점에서 무언가를 희망한다는 것이 어렵겠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그 순간 우리는 예전의 자신보다 더 나은 인생을 생각하고 꿈꾼다는 점에서 인생은 참 신비롭다. 그런 탓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몇 번이나 다른 삶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전 세계를 이어주는 바다처럼 인생은 광활하고 끝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무한한 삶. 서론이 길었다.
큰 변화를 겪었던 2017년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삶 전체를 옮긴 해였다. 많은 변화다. 왜냐하면 결혼했기 때문이다. 큐레이터라는 직업 특성상 전시 전에는 오랜 시간 일터에서 머물러야 하므로 오랜 고민 끝에 퇴사했다. 퇴사 후 결혼하고, 삶의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뉴욕으로 넘어온 후, 간간이 예술 관련된 일들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코로나가 왔고, 임신과 출산을 했다. 2020년의 일이다. 그 이후에 있는 일들은 육아와 일의 병행이었다. 2022년에는 한국에서 가질 크고 작은 전시를 준비했다. 많지는 않아도 몇 번을 해봐도 쉽지 않은 전시 기획은 리서치(작가, 주제 등)에 할애하는 시간이 길수록 좋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어렵다. 일에 있어 시간과 노력 그리고 수고는 늘 비례한다. 미국에서 리모트(romote)로 일하면서 뒤바뀐 시간 문제가 가장 컸기 때문에 다른 큐레이터, 작가님들께 일하면서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언제나 늘 이리저리 분주한 상황이 나에게는 버거웠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글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결국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매체가 다를 뿐 같기 때문이다. 2019년부터 월간 퍼블릭아트 매거진에 미국 통신원으로 글을 쓰고 있었고, 다양한 곳에서 글 의뢰가 들어와 더 많은 글을 쓰게 되었다. 작가들을 만나며 작품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대상의 본질을 살피며, 그에 대한 가치와 맥락을 짚어보는 일은 낭만적이고 가치 있는 일이다. 하나의 장면을 조성하고, 공공적인 영역에서 나만의 큐레토리얼을 수행하는 수단으로 삼는 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공공의 영역에서 누군가와 함께 어떤 주제를 가지고 대화하는 것. 그래서 기획된 것이 <오렌지 라운드테이블>[1]이었다. 물론 2024 한국미술 비평문 번역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된 일이었지만, 회의, 대화, 글쓰기, 소셜 미디어, 책 이 모든 것이 나의 큐레토리얼 실천이었다. 낯설고, 어렵지만 예술은 우리가 매일 일상적으로 조금씩 말하고 있다. 공공 영역에서 필요한 것은 연구와 교육이다. 적어도 지금 상태에선 최선의 실천이다. 하루에 주어진 자유시간 딱 4시간. 분 단위를 나눠 치열하게 지독했던 시간이 지나간다.
리셋, 시작
사실 아이를 가진 큐레이터 혹은 예술가를 지속적으로 일을 할 수 있기 위해선, 일과 양육 사이 선택이 필수다. -물론 아닌 예도 있다- 그것은 아이를 양육하기 위해 더 적절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은 돈이 있어야 하는 경제적 문제기도 하다. 혹은 변화된 삶의 주도권과 새로운 정체성을 찾기 위한 사회적 맥락 문제 -혹은 문화적 맥락일 수도 있다- 이기도 하다. 결국 모성과 커리어는 분명 다른 정체성이다. 하지만 이를 서로 보완하며 성장할 수 있는 관계이기도 하다. 엄마라는 책무 앞에서 솔직해져야만 했다. 그래서 앞 서론이 길었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고, 누군가는 아이를 돌봐야 한다. 그래, 상황에 맞게 계획을 재고해 보자. 내가 해왔던 것 중, 할 수 있는 것은 글쓰기와 교육이었다. 그럼 예술이 아닌 범위에서 가르칠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본다. 이젠 익숙해졌지만, 아직도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 이방인. 한국어를 가르쳐보자. 그 무엇도 방해받지 않는 우리의 언어 속에서, 얽매이지 않고 나의 언어로 말하고 가르치는 것. 그래서 나는 한국어 선생님이 되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가르치는. 우리 아이도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한다. 나처럼 두 개의 정체성.
영어에 의해 납작해지고 단조로워진 억양을 단숨에 납작하게 눌러버릴 기회. 너무 과격한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을 만나볼 설렘보다는 노심초사한 마음이 앞선다. 이제까지 굴욕 혹은 가여웠던 아시아 억양. 나는 이를 단숨에 눌러 부드럽고 때론 정확하게 단호해질 것이다. 왜 이런 도전적인 마음이 생기는 걸까? 무릇, 캐시 박 홍 작가 책의 몇 구절이 생각난다. “내가 영어를 타자화하는 방식은 영어가 나를 집어삼키기 전에 먼저 영어를 집어삼키는 것이다. 나는 진지하게 시를 쓰기 시작한 이래로 부정확한 영어를 이용했다. 마치 아마추어 연주자가 전문 오케스트라에 들어가 엉뚱한 부분에서 심벌즈를 울리거나 도입부보다 먼저 플루트 연주에 들어가듯 용어 선택을 실험했다. 고생해야 할 때 저급한 어휘를 쓰고, 가벼운 대화에 고귀한 웅변을 사용했다.” [2] 언어 중 가장 널리 쓰이는 만국 공통어, 끝없이 확장되는 신자유주의적 소비의 언어인 영어. 누군가의 정체성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언어. 정체성을 탐구해 나가는 방식은 다양하다. 필자가 자주 만나는 예술가들은 대부분 작품을 통해 말한다. 글을 쓰는 작가는 글을 통해 말한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 중 몇몇은 부모님이 한국인인데, 한국어를 몰라서 오는 경우가 있다. 혹은 한국어에 대한 지식은 전무하지만 그저 한국 음악과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 예술은 언어라고 감히 말한다. 예술과 언어는 직접 참여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 둘의 가치는 직접 참여하고, 고군분투하여 스스로 익숙해지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 부분에서는 이들의 고군분투가 기대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서투른 한국어가 이들의 유산이 되길 바라본다.
새삼스레 희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4년까지 많은 것을 남겼다. 아름다운 추억도 남겼고, 아쉬움도 남겼고, 많은 문장과 글도 남겼다. 그 남김의 사이 빈틈엔 다른 부분이 채워질 수 있도록 둔다. 괜찮을까? 달라질까? 반복될까? 더 깊어질지 아니면 이대로 채워지지 않고 멈춰버릴까? 늘 의문투성이지만. 가만있으면 해결되지 않는 것들은 올해 더 열심히 해보기로 했다. 정작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손을 놓고 있을 때 다시 작년의 일들을 떠올릴 것이다. 2024년 내내 기대했던 말, 하려고 했던 일, 새로운 것에 대한 해방감.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을까? 새로운 희망을 볼 수 있을까?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희망을 그리고 위로를 생각할 수 있는 한 해가 되길 바래본다.
“우리가 희망 속에서 희망하는 것은, 어둠 속에서 희망하는 것은, 빛이 있다는 사실의, 마음으로부터의 희망이다. 희망은(사태가 아니라) 희망을 희망한다. 거기에 희망의 미스터리가 있다. 빛이 저기에, 그저 나타나서 춤춘다는 사실, 그 빛은 망(亡)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작은 순간의 창조이다.”
- 김홍중, 사회학적 파상력 중에서
에필로그: 아니, 근데, 다짐과 희망을 쓰고 이 글엔 내내 물음표만 가득한 이야기뿐이네. (허허) 일상 비틀기. 또 다른 주제처럼 반복되는 것.
[1] <오렌지 라운드테이블>은 2024년 12월 4일, 뉴욕한국문화원에서 진행된 라운드테이블 행사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여성 예술가들이 주도하는 변화와 에너지를 상징하는 주황색에서 영감을 얻었다. 주황색은 새로운 시작과 변화를 의미하는 색으로, 네 명의 여성 예술가-이하윤, 노혜리, 진오, 전효주-이 함께 만들어가는 예술적 변화의 흐름을 나타낸다. 이들은 각자의 예술적 에너지를 모아 현재 예술계에 새로운 방향성을 나누고, 앞으로의 예술적, 사회적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표본이 되고자 라운드테이블을 진행했다. 필자가 쓴 네 명의 여성 예술가들의 비평 글을 중심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이 책은 네 명의 여성 예술가가 다루는 매체와 장르 속에서 갖는 구체적 의미, 기능, 관계성을 탐구한다. 라운드테이블 에서 나눈 수많은 주제 속에서 예측불허의 상태, 불확실성은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과 기대를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관점을 제시했다.
[2] 캐시 박 홍 지음, 노시내 옮김, 『마이너 필링스』(도서출판 마티, 2024), p. 137, 139
2025.02.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February.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예술과 언어를 담아내는 몇 개의 자아
정재연
변화
유달리 추운 이번 겨울, 오늘도 새로운 아침을 맞이한다. 2025년을 마주하고 며칠 동안 고민한다. 그리고 컴퓨터에 앞에 앉는다. 새로운 브라우저 창을 열고, 또 한참 동안을 고민한다. 내가 찾고 있는 희망은 무엇일까? 내가 찾고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내가 찾는 눈부신 희망은 눈이 부실 정도로 나를 반짝이고, 아름답게 해주는 것일까? 그런 헛된 희망을 품고 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다. “아, 맞다.” 그러다가 작년에 했던 일을 생각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할까. 나는 무엇에 집중하는 것일까. 내가 꿈꾸는 미래는 어떤 모습이지. 아직도 나는 무언가를 쫓는 사람이구나. 어지러운 세상일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지금 현시점에서 무언가를 희망한다는 것이 어렵겠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그 순간 우리는 예전의 자신보다 더 나은 인생을 생각하고 꿈꾼다는 점에서 인생은 참 신비롭다. 그런 탓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몇 번이나 다른 삶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전 세계를 이어주는 바다처럼 인생은 광활하고 끝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무한한 삶. 서론이 길었다.
큰 변화를 겪었던 2017년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삶 전체를 옮긴 해였다. 많은 변화다. 왜냐하면 결혼했기 때문이다. 큐레이터라는 직업 특성상 전시 전에는 오랜 시간 일터에서 머물러야 하므로 오랜 고민 끝에 퇴사했다. 퇴사 후 결혼하고, 삶의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뉴욕으로 넘어온 후, 간간이 예술 관련된 일들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코로나가 왔고, 임신과 출산을 했다. 2020년의 일이다. 그 이후에 있는 일들은 육아와 일의 병행이었다. 2022년에는 한국에서 가질 크고 작은 전시를 준비했다. 많지는 않아도 몇 번을 해봐도 쉽지 않은 전시 기획은 리서치(작가, 주제 등)에 할애하는 시간이 길수록 좋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어렵다. 일에 있어 시간과 노력 그리고 수고는 늘 비례한다. 미국에서 리모트(romote)로 일하면서 뒤바뀐 시간 문제가 가장 컸기 때문에 다른 큐레이터, 작가님들께 일하면서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언제나 늘 이리저리 분주한 상황이 나에게는 버거웠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글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결국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매체가 다를 뿐 같기 때문이다. 2019년부터 월간 퍼블릭아트 매거진에 미국 통신원으로 글을 쓰고 있었고, 다양한 곳에서 글 의뢰가 들어와 더 많은 글을 쓰게 되었다. 작가들을 만나며 작품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대상의 본질을 살피며, 그에 대한 가치와 맥락을 짚어보는 일은 낭만적이고 가치 있는 일이다. 하나의 장면을 조성하고, 공공적인 영역에서 나만의 큐레토리얼을 수행하는 수단으로 삼는 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공공의 영역에서 누군가와 함께 어떤 주제를 가지고 대화하는 것. 그래서 기획된 것이 <오렌지 라운드테이블>[1]이었다. 물론 2024 한국미술 비평문 번역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된 일이었지만, 회의, 대화, 글쓰기, 소셜 미디어, 책 이 모든 것이 나의 큐레토리얼 실천이었다. 낯설고, 어렵지만 예술은 우리가 매일 일상적으로 조금씩 말하고 있다. 공공 영역에서 필요한 것은 연구와 교육이다. 적어도 지금 상태에선 최선의 실천이다. 하루에 주어진 자유시간 딱 4시간. 분 단위를 나눠 치열하게 지독했던 시간이 지나간다.
리셋, 시작
사실 아이를 가진 큐레이터 혹은 예술가를 지속적으로 일을 할 수 있기 위해선, 일과 양육 사이 선택이 필수다. -물론 아닌 예도 있다- 그것은 아이를 양육하기 위해 더 적절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은 돈이 있어야 하는 경제적 문제기도 하다. 혹은 변화된 삶의 주도권과 새로운 정체성을 찾기 위한 사회적 맥락 문제 -혹은 문화적 맥락일 수도 있다- 이기도 하다. 결국 모성과 커리어는 분명 다른 정체성이다. 하지만 이를 서로 보완하며 성장할 수 있는 관계이기도 하다. 엄마라는 책무 앞에서 솔직해져야만 했다. 그래서 앞 서론이 길었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고, 누군가는 아이를 돌봐야 한다. 그래, 상황에 맞게 계획을 재고해 보자. 내가 해왔던 것 중, 할 수 있는 것은 글쓰기와 교육이었다. 그럼 예술이 아닌 범위에서 가르칠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본다. 이젠 익숙해졌지만, 아직도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 이방인. 한국어를 가르쳐보자. 그 무엇도 방해받지 않는 우리의 언어 속에서, 얽매이지 않고 나의 언어로 말하고 가르치는 것. 그래서 나는 한국어 선생님이 되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가르치는. 우리 아이도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한다. 나처럼 두 개의 정체성.
영어에 의해 납작해지고 단조로워진 억양을 단숨에 납작하게 눌러버릴 기회. 너무 과격한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을 만나볼 설렘보다는 노심초사한 마음이 앞선다. 이제까지 굴욕 혹은 가여웠던 아시아 억양. 나는 이를 단숨에 눌러 부드럽고 때론 정확하게 단호해질 것이다. 왜 이런 도전적인 마음이 생기는 걸까? 무릇, 캐시 박 홍 작가 책의 몇 구절이 생각난다. “내가 영어를 타자화하는 방식은 영어가 나를 집어삼키기 전에 먼저 영어를 집어삼키는 것이다. 나는 진지하게 시를 쓰기 시작한 이래로 부정확한 영어를 이용했다. 마치 아마추어 연주자가 전문 오케스트라에 들어가 엉뚱한 부분에서 심벌즈를 울리거나 도입부보다 먼저 플루트 연주에 들어가듯 용어 선택을 실험했다. 고생해야 할 때 저급한 어휘를 쓰고, 가벼운 대화에 고귀한 웅변을 사용했다.” [2] 언어 중 가장 널리 쓰이는 만국 공통어, 끝없이 확장되는 신자유주의적 소비의 언어인 영어. 누군가의 정체성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언어. 정체성을 탐구해 나가는 방식은 다양하다. 필자가 자주 만나는 예술가들은 대부분 작품을 통해 말한다. 글을 쓰는 작가는 글을 통해 말한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 중 몇몇은 부모님이 한국인인데, 한국어를 몰라서 오는 경우가 있다. 혹은 한국어에 대한 지식은 전무하지만 그저 한국 음악과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 예술은 언어라고 감히 말한다. 예술과 언어는 직접 참여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 둘의 가치는 직접 참여하고, 고군분투하여 스스로 익숙해지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 부분에서는 이들의 고군분투가 기대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서투른 한국어가 이들의 유산이 되길 바라본다.
새삼스레 희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4년까지 많은 것을 남겼다. 아름다운 추억도 남겼고, 아쉬움도 남겼고, 많은 문장과 글도 남겼다. 그 남김의 사이 빈틈엔 다른 부분이 채워질 수 있도록 둔다. 괜찮을까? 달라질까? 반복될까? 더 깊어질지 아니면 이대로 채워지지 않고 멈춰버릴까? 늘 의문투성이지만. 가만있으면 해결되지 않는 것들은 올해 더 열심히 해보기로 했다. 정작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손을 놓고 있을 때 다시 작년의 일들을 떠올릴 것이다. 2024년 내내 기대했던 말, 하려고 했던 일, 새로운 것에 대한 해방감.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을까? 새로운 희망을 볼 수 있을까?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희망을 그리고 위로를 생각할 수 있는 한 해가 되길 바래본다.
“우리가 희망 속에서 희망하는 것은, 어둠 속에서 희망하는 것은, 빛이 있다는 사실의, 마음으로부터의 희망이다. 희망은(사태가 아니라) 희망을 희망한다. 거기에 희망의 미스터리가 있다. 빛이 저기에, 그저 나타나서 춤춘다는 사실, 그 빛은 망(亡)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작은 순간의 창조이다.”
- 김홍중, 사회학적 파상력 중에서
에필로그: 아니, 근데, 다짐과 희망을 쓰고 이 글엔 내내 물음표만 가득한 이야기뿐이네. (허허) 일상 비틀기. 또 다른 주제처럼 반복되는 것.
[1] <오렌지 라운드테이블>은 2024년 12월 4일, 뉴욕한국문화원에서 진행된 라운드테이블 행사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여성 예술가들이 주도하는 변화와 에너지를 상징하는 주황색에서 영감을 얻었다. 주황색은 새로운 시작과 변화를 의미하는 색으로, 네 명의 여성 예술가-이하윤, 노혜리, 진오, 전효주-이 함께 만들어가는 예술적 변화의 흐름을 나타낸다. 이들은 각자의 예술적 에너지를 모아 현재 예술계에 새로운 방향성을 나누고, 앞으로의 예술적, 사회적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표본이 되고자 라운드테이블을 진행했다. 필자가 쓴 네 명의 여성 예술가들의 비평 글을 중심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이 책은 네 명의 여성 예술가가 다루는 매체와 장르 속에서 갖는 구체적 의미, 기능, 관계성을 탐구한다. 라운드테이블 에서 나눈 수많은 주제 속에서 예측불허의 상태, 불확실성은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과 기대를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관점을 제시했다.
[2] 캐시 박 홍 지음, 노시내 옮김, 『마이너 필링스』(도서출판 마티, 2024), p. 137, 139
2025.02.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February.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