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 the Canvas Ep. 1 - 나는 시간 빌게이츠가 아니다.
박천, 시안미술관 학예실장
나는 전시를 꽤 많이 보는 편에 속한다. 전시를 봐야 기획도 할 수 있고, 글도 쓸 수 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그렇다고 싫은데 억지로 본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웃픈' 것은 전시를 보기 위한 시간을 자주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 뿐만 아니라 주변의 이쪽 업계(?) 종사자(작가포함)들이 대부분 하루나 이틀 정도 날을 잡아서 전시를 돈(본)다. 그럴때 전시장에서 영상작품을 만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진다. 더군다나 요즘 전시를 돌다 보면, 영상작품이 어찌나 많은지 조금은 지칠 때가 있다. 여러 전시를 시간을 분배해서 효율적으로 봐야하는 입장에서는 각각의 영상을 온전히 다 보기란 다소 어려운 일이다. 보통 한 작품이 몇 분에서 길게는 수십 분짜리도 있는데, 여러 전시를 둘러볼 때 이 모든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려면 도대체 얼마나 걸릴지 가늠하기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그냥 그 전시 하나만 보러 오는 것이라면 영상 작품을 다 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 이런 전시는 나에게 맞지 않는 듯 하다. 내가 '시간 빌게이츠'라면 모든게 해결이 되겠지만... 현실은 시간도 없고 돈도 없다. 게다가 전시장에서 상영되는 영상은 대부분 루프(반복 재생) 방식이라, 언제부터가 시작이고 언제가 끝인지 모호하다. “처음부터 봐야 할 텐데, 지금은 중간 부분인가? 끝 부분인가”라는 생각이 들면 이미 집중력이 떨어져버리곤 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아무리 의미 있는 작품이라 해도 놓치게 되는 순간이 생길 수밖에 없다.
출처: 박천
이렇게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에 서서 영상작품에 대한 안타까움을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레 다른 형태의 안타까운(?) 미디어 작품들이 떠오른다. 전시를 돌다 보면 종종 VR 헤드셋을 쓰고 작품을 체험하라고 권유받거나, 센서를 이용해 관객과 상호작용하는 인터랙티브한 작품을 만나기도 한다. 게다가 몇 년 전만 해도 모두가 '메타버스'라는 단어에 열광해서, 가상공간에서 전시를 열고 작품을 감상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러나 나는 당시에도 돈이 없었기 때문에 (다행히) 메타버스 코인에 탑승하지 않았다(못했다). 어쩌면 “영상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문제의식(혹은 위기의식)이, 자연스럽게 이런 새로운 매체로 확장하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 같다. 이미 미술관에서 영상 작품이 주류(?)의 자리를 꿰찬지 오래이니, 다음 단계를 고민하게 되는 셈이다. 작가나 큐레이터 입장에서도 “관객에게경험을 제공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VR, 인터랙티브, AI 같은 기술이 추가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시도’가 정말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는지, 아니면 기술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에 그치는지에 대해서는 늘 물음표가 따라붙는다.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 자체보다도, 도대체 작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라는 의문이 계속해서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기술을 탑재한 VR이나 인터랙티브, AI, 메타버스 같은 매체들이 그 옛날, 벤야민(의 아우라)에게 또 패배하게 된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머니때문일 것이다. 전시장에서 만나는 뉴미디어 매체들은 솔직히 말해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상업 미디어와 비교하면 그 완성도가 초라해 보일 때가 많다. 영화나 게임 산업은 이미 수십억, 수백억 원대의 예산을 기반으로 압도적인 시청각적 경험을 만들어내고 있는 반면, 예술 현장에서는 개인 혹은 소규모 팀이, 한정된 예산으로 작업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기발한 아이디어라도, 구현 단계에서 기술적 난관이 생기면 금세 한계가 봉착하고 만다. 작품의 규모나 퀄리티 면에서 상업 미디어를 따라가기 어렵고, 운영이나 유지 보수에도 어려움이 따른다. 예컨대 센서를 활용한 인터랙티브 설치물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VR 시스템이 자주 에러를 일으키면, 관객은 “새로운 예술 체험”보다는 “기술이 부족한 엉성한 장치”라는 인상을 먼저 받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의도 자체는 흥미롭지만, 자본을 기반으로 한 상업 매체에서 이미 극강의 퀄리티를 맛본 대중에게, 예술 쪽은 아직 준비가 덜 된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종종 등장하는 예가 올라퍼 엘리아슨 같은 작가다. 최근 전라남도 신안에 올라퍼 엘리아슨의 작품 「숨결의 지구(Breathig earth sphere)」가 준공되었다는 기사를 봤는데, 제작비가 무려 63억 원이라는 소식에 너무 부럽고 배가 아팠다. 나는 반년 전에 800만원이라는 말도 안되는 금액으로 400평 정도의 미술관 전관을 구성하기 위해 작가들과 함께 영혼을 갈아 넣었었다. 잠시 딴 길로샛는데, 이어가자면, 이 사건은 꽤 화제가 되었다. 올라퍼 엘리아슨은 세계적인 스타 작가로, 수십 명 이상의 전문 인력과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거대한 환경 설치물을 만드는 작가다. 태양을 실내에 재현한다거나, 날씨를 통제하는 듯한 체험형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보통 예술 프로젝트에서 63억 원이라는 비용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이 정도 규모라면, 웬만한 게임이나 영화 프로젝트와 맞먹는 자본력을 가졌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래서 올라퍼 엘리아슨의 작업은 영화나 게임의 스펙터클과 경쟁해도 뒤지지 않을 법한 물리적 체험과 시각적 충격을 제공한다(그런데 나는 아직 실제로 본적은 없다). 그렇지만 이런 사례는 전세계 예술계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출처: 박준수
자본과 예술의 관계를 놓고 보면, 늘 ‘예술이 자본에 밀리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말이 뒤따른다. 상업 미디어나 엔터테인먼트가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해 훌륭한 시청각적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동안, 예술 쪽은 상대적으로 협소한 지원과 예산 속에서 버텨야 하기 때문이다. 게임이나 영화를 즐기는 대중은 막대한 자본이 실현한 최첨단 기술에 쉽게 감탄하는데, 예술작품이 비슷한 수준의 기술적 성취를 보여주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이 “자본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이 뒤처진다”는 구도를 언제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누군가는 오히려 “예술의 가치는 자본에서 독립해야 비로소 성립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지만. 물론 자본이 투입되면 작품의 외형적 완성도나 규모 면에서 파급력이 커질 수 있지만, 그것이 진정한 예술성을 담보하지는 않는다는 의견이다. 이를테면 최소한의 예산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면, 오히려 그 결핍이 예술적 독창성을 살려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출처: 서울경제
그러나 이상적인 관념과 달리, 현실의 작품 제작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예산은 곧 작품의 콘셉트와 완성도를 좌우하기 마련이고, 자본이 풍족하지 않으면 작가의 의도가 충분히 실현되지 못한 채 끝나버릴 위험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 vs 예술”의 충돌 속에서 예술이 언제나 불리한 위치에 있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예술이 자본에 기대지 않고 자생하려면, 자본의 힘이 아닌 다른 무기를 갖춰야 한다는 과제가 남는다. 어떤 사람들은 ‘지루함’이나 ‘날것 같은 표현’을 그 무기로 삼고, 또 어떤 사람들은 ‘현장성’이나 ‘관객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강조한다. 어디까지나 다양한 시도가 열려 있는 가운데, 예술은 자본과의 경합을 피할 수 없는 무대 위에 있는 셈이다.
그러면 이 지점에서 '자본으로부터 독립한 예술이 곧 진정한 예술성일까'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자본 없이도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은 무척 이상적으로 들리지만, 실제 제작 환경에서 자본은 많은 것을 좌우한다. 반면, 자본의 논리에 너무 얽매이면 “거대 규모의 예술만 예술이다”라는 식의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현실적으로 예술가에게 중요한 건, 제한된 자원 속에서도 어떻게 독자적인 시도와 메시지를 성공적으로 구현하느냐가 되겠다.
이 과정에서 자주 거론되는 것이 ‘지루함’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전략이다. 화려한 시청각 효과를 보여주기 힘들다면, 아예 반대로 느림과 반복, 날것 같은 장면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여서 관객의 심리를 흔드는 것이다. 상업 미디어가 빠른 전개와 강렬한 자극으로 승부한다면, 예술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법한 대상과 느린 호흡을 통해 관객에게 다른 차원의 몰입을 유도할 수 있다. 물론 지루함이 꼭 의도된 것만은 아닐 수 있고, 그럴듯한 변명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로 작가가 ‘단조로움과 느림’을 무기로 설정했다면, 기존 상업 매체가 따라하기 어려운 독특한 감상 체험을 만들어낼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전략마저도 이제는 상업 미디어가 가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기 위해 다시 영상작품으로 돌아가 보면, 최근 몇 년간 다큐멘터리 형식의 작업이 부쩍 늘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정확한 통계 수치는 찾기 어렵지만, 여러 미술관 전시나 비엔날레 사례를 살펴보면, 설명하는 듯한 다큐 형식 영상이 꽤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다(어쩌면 인상에 남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작가들이 현장을 직접 촬영하고, 자료 화면을 덧붙이는 식으로 구성한 작품들을 많이들 목격했을 것이다.
이런 다큐 형식이 늘어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우선 사회·환경·정치 문제처럼 현시대의 구체적인 상황을 예술로 기록하고, 관객에게 경각심을 주려는 시도일 수 있겠다. 기존의 기록 매체인 영상 다큐와 예술이 결합되면, 예술적 해석과 실질적 현장의 결합이라는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의 특성상 많은 정보를 전달해야 하다 보니, 작품 러닝타임이 길어지거나 내러티브가 복잡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전시장의 루프 형식과 맞물려, “어느 지점에서부터 봐야 하고, 어디까지 보는 게 맞는가”라는 문제는 아직도 큰 숙제로 남아있다.
게다가 다큐 형식은 방송사나 전문 다큐 제작자들이 이미 높은 수준으로 대중에게 선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작품이 이를 어떻게 차별화할지가 또 다른 숙제가 된다. 어쩌면 “TV에서 보는 다큐보다 어설프다”는 평가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큐 형식 작품이 지속적으로 보이는 것은, 작가가 현실 문제에 개입하고자 하는 예술적 열망과, 상업 미디어와는 다른 방식과 시선으로 기록하고 전달하려는 욕구가 교차하는 지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현상에서 또 다시 자본이라는 함수를 넣고 반추해 보면, 방송국의 대형 다큐멘터리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10여년 전의 프로그램이지만) ‘북극의 눈물’, ‘아마존의 눈물’ 같은 작품은 정확한 제작비를 알 순 없지만, 상당한 자본과 인력을 투입해 뛰어난 화면미와 스토리텔링을 보여주었다. 자연스럽게 시청자는 거대한 자연의 모습을 초고화질로 감상하면서, 동시에 환경 파괴나 기후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느끼게 되었다.
반면 전시장에서 만나는 예술 다큐는, 제작 여건이 훨씬 제한적일 때가 많다. 가령 비슷한 주제라도 화면의 해상도나 편집 기술, 촬영 규모 면에서 방송사 다큐와 비교될 수밖에 없다. 물론 예술 다큐가 꼭 자본력을 뽐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관객의 눈높이가 이미 완성도 높은 대중 매체에 길들여져 있다면, 예술 쪽 다큐는 상대적으로 부실하다는 느낌을 받을 위험이 있다. 그래서인지, 예술가들은 오히려 날것의 질감이나 느린 호흡 등 상업 다큐가 추구하지 않는 포맷으로 차별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또 작품에서 드러나는 메시지나 작가의 관점, 관객이 얻는 사유의 폭 등은 상업 다큐와 다른 방향으로 깊어질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전에, 관객이 실제 전시 현장에서 이를 제대로 체감하도록 만들려면, 앞서 말한 루프 방식과 긴 상영시간 등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한 고민이 더 먼저이지 않을까.
전시를 보며 드는 생각을 두서없이 나열하다보면, 슬프게도 이 문제들은 ‘나도’ 해결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본과 기술의 격차, 루프 상영의 난점, 새 매체의 미적 한계 등 온갖 문제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여전히 스스로의 길을 탐색(방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작품 한 편을 온전히 집중해 보려는 관객의 태도를 종용할 것인지, 작가에게 좀 더 짧고 임팩트 있는 편집을 기대해야할지 모르겠다. 결국 나 또한 관객에게 바라는 것은 (여건이 되든 안 되든) 이 작품에 머무르며 생각할 시간과 시선을 확보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의 삶은 늘 빠듯하고, 이미 상업 미디어에서 완성도 높은 경험을 제공받은 관객은 예술의 ‘결핍’을 쉽게 외면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술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들이 풀어야 할 숙제인 것이다. 결핍을 무기로 삼는 예술의 전략이 언제까지 유효할지, 상업 미디어와 다른 깊이를 어디까지 얼마나 담아낼 수 있을지는 확신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그런 고민을 계속 이어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예술의 가능성을 조금씩 넓혀가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싶다.
2025.03.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March.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Off the Canvas Ep. 1 - 나는 시간 빌게이츠가 아니다.
박천, 시안미술관 학예실장
나는 전시를 꽤 많이 보는 편에 속한다. 전시를 봐야 기획도 할 수 있고, 글도 쓸 수 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그렇다고 싫은데 억지로 본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웃픈' 것은 전시를 보기 위한 시간을 자주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 뿐만 아니라 주변의 이쪽 업계(?) 종사자(작가포함)들이 대부분 하루나 이틀 정도 날을 잡아서 전시를 돈(본)다. 그럴때 전시장에서 영상작품을 만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진다. 더군다나 요즘 전시를 돌다 보면, 영상작품이 어찌나 많은지 조금은 지칠 때가 있다. 여러 전시를 시간을 분배해서 효율적으로 봐야하는 입장에서는 각각의 영상을 온전히 다 보기란 다소 어려운 일이다. 보통 한 작품이 몇 분에서 길게는 수십 분짜리도 있는데, 여러 전시를 둘러볼 때 이 모든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려면 도대체 얼마나 걸릴지 가늠하기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그냥 그 전시 하나만 보러 오는 것이라면 영상 작품을 다 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 이런 전시는 나에게 맞지 않는 듯 하다. 내가 '시간 빌게이츠'라면 모든게 해결이 되겠지만... 현실은 시간도 없고 돈도 없다. 게다가 전시장에서 상영되는 영상은 대부분 루프(반복 재생) 방식이라, 언제부터가 시작이고 언제가 끝인지 모호하다. “처음부터 봐야 할 텐데, 지금은 중간 부분인가? 끝 부분인가”라는 생각이 들면 이미 집중력이 떨어져버리곤 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아무리 의미 있는 작품이라 해도 놓치게 되는 순간이 생길 수밖에 없다.
출처: 박천
이렇게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에 서서 영상작품에 대한 안타까움을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레 다른 형태의 안타까운(?) 미디어 작품들이 떠오른다. 전시를 돌다 보면 종종 VR 헤드셋을 쓰고 작품을 체험하라고 권유받거나, 센서를 이용해 관객과 상호작용하는 인터랙티브한 작품을 만나기도 한다. 게다가 몇 년 전만 해도 모두가 '메타버스'라는 단어에 열광해서, 가상공간에서 전시를 열고 작품을 감상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러나 나는 당시에도 돈이 없었기 때문에 (다행히) 메타버스 코인에 탑승하지 않았다(못했다). 어쩌면 “영상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문제의식(혹은 위기의식)이, 자연스럽게 이런 새로운 매체로 확장하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 같다. 이미 미술관에서 영상 작품이 주류(?)의 자리를 꿰찬지 오래이니, 다음 단계를 고민하게 되는 셈이다. 작가나 큐레이터 입장에서도 “관객에게경험을 제공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VR, 인터랙티브, AI 같은 기술이 추가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시도’가 정말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는지, 아니면 기술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에 그치는지에 대해서는 늘 물음표가 따라붙는다.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 자체보다도, 도대체 작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라는 의문이 계속해서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기술을 탑재한 VR이나 인터랙티브, AI, 메타버스 같은 매체들이 그 옛날, 벤야민(의 아우라)에게 또 패배하게 된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머니때문일 것이다. 전시장에서 만나는 뉴미디어 매체들은 솔직히 말해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상업 미디어와 비교하면 그 완성도가 초라해 보일 때가 많다. 영화나 게임 산업은 이미 수십억, 수백억 원대의 예산을 기반으로 압도적인 시청각적 경험을 만들어내고 있는 반면, 예술 현장에서는 개인 혹은 소규모 팀이, 한정된 예산으로 작업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기발한 아이디어라도, 구현 단계에서 기술적 난관이 생기면 금세 한계가 봉착하고 만다. 작품의 규모나 퀄리티 면에서 상업 미디어를 따라가기 어렵고, 운영이나 유지 보수에도 어려움이 따른다. 예컨대 센서를 활용한 인터랙티브 설치물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VR 시스템이 자주 에러를 일으키면, 관객은 “새로운 예술 체험”보다는 “기술이 부족한 엉성한 장치”라는 인상을 먼저 받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의도 자체는 흥미롭지만, 자본을 기반으로 한 상업 매체에서 이미 극강의 퀄리티를 맛본 대중에게, 예술 쪽은 아직 준비가 덜 된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종종 등장하는 예가 올라퍼 엘리아슨 같은 작가다. 최근 전라남도 신안에 올라퍼 엘리아슨의 작품 「숨결의 지구(Breathig earth sphere)」가 준공되었다는 기사를 봤는데, 제작비가 무려 63억 원이라는 소식에 너무 부럽고 배가 아팠다. 나는 반년 전에 800만원이라는 말도 안되는 금액으로 400평 정도의 미술관 전관을 구성하기 위해 작가들과 함께 영혼을 갈아 넣었었다. 잠시 딴 길로샛는데, 이어가자면, 이 사건은 꽤 화제가 되었다. 올라퍼 엘리아슨은 세계적인 스타 작가로, 수십 명 이상의 전문 인력과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거대한 환경 설치물을 만드는 작가다. 태양을 실내에 재현한다거나, 날씨를 통제하는 듯한 체험형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보통 예술 프로젝트에서 63억 원이라는 비용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이 정도 규모라면, 웬만한 게임이나 영화 프로젝트와 맞먹는 자본력을 가졌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래서 올라퍼 엘리아슨의 작업은 영화나 게임의 스펙터클과 경쟁해도 뒤지지 않을 법한 물리적 체험과 시각적 충격을 제공한다(그런데 나는 아직 실제로 본적은 없다). 그렇지만 이런 사례는 전세계 예술계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출처: 박준수
자본과 예술의 관계를 놓고 보면, 늘 ‘예술이 자본에 밀리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말이 뒤따른다. 상업 미디어나 엔터테인먼트가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해 훌륭한 시청각적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동안, 예술 쪽은 상대적으로 협소한 지원과 예산 속에서 버텨야 하기 때문이다. 게임이나 영화를 즐기는 대중은 막대한 자본이 실현한 최첨단 기술에 쉽게 감탄하는데, 예술작품이 비슷한 수준의 기술적 성취를 보여주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이 “자본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이 뒤처진다”는 구도를 언제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누군가는 오히려 “예술의 가치는 자본에서 독립해야 비로소 성립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지만. 물론 자본이 투입되면 작품의 외형적 완성도나 규모 면에서 파급력이 커질 수 있지만, 그것이 진정한 예술성을 담보하지는 않는다는 의견이다. 이를테면 최소한의 예산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면, 오히려 그 결핍이 예술적 독창성을 살려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출처: 서울경제
그러나 이상적인 관념과 달리, 현실의 작품 제작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예산은 곧 작품의 콘셉트와 완성도를 좌우하기 마련이고, 자본이 풍족하지 않으면 작가의 의도가 충분히 실현되지 못한 채 끝나버릴 위험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 vs 예술”의 충돌 속에서 예술이 언제나 불리한 위치에 있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예술이 자본에 기대지 않고 자생하려면, 자본의 힘이 아닌 다른 무기를 갖춰야 한다는 과제가 남는다. 어떤 사람들은 ‘지루함’이나 ‘날것 같은 표현’을 그 무기로 삼고, 또 어떤 사람들은 ‘현장성’이나 ‘관객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강조한다. 어디까지나 다양한 시도가 열려 있는 가운데, 예술은 자본과의 경합을 피할 수 없는 무대 위에 있는 셈이다.
그러면 이 지점에서 '자본으로부터 독립한 예술이 곧 진정한 예술성일까'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자본 없이도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은 무척 이상적으로 들리지만, 실제 제작 환경에서 자본은 많은 것을 좌우한다. 반면, 자본의 논리에 너무 얽매이면 “거대 규모의 예술만 예술이다”라는 식의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현실적으로 예술가에게 중요한 건, 제한된 자원 속에서도 어떻게 독자적인 시도와 메시지를 성공적으로 구현하느냐가 되겠다.
이 과정에서 자주 거론되는 것이 ‘지루함’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전략이다. 화려한 시청각 효과를 보여주기 힘들다면, 아예 반대로 느림과 반복, 날것 같은 장면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여서 관객의 심리를 흔드는 것이다. 상업 미디어가 빠른 전개와 강렬한 자극으로 승부한다면, 예술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법한 대상과 느린 호흡을 통해 관객에게 다른 차원의 몰입을 유도할 수 있다. 물론 지루함이 꼭 의도된 것만은 아닐 수 있고, 그럴듯한 변명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로 작가가 ‘단조로움과 느림’을 무기로 설정했다면, 기존 상업 매체가 따라하기 어려운 독특한 감상 체험을 만들어낼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전략마저도 이제는 상업 미디어가 가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기 위해 다시 영상작품으로 돌아가 보면, 최근 몇 년간 다큐멘터리 형식의 작업이 부쩍 늘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정확한 통계 수치는 찾기 어렵지만, 여러 미술관 전시나 비엔날레 사례를 살펴보면, 설명하는 듯한 다큐 형식 영상이 꽤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다(어쩌면 인상에 남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작가들이 현장을 직접 촬영하고, 자료 화면을 덧붙이는 식으로 구성한 작품들을 많이들 목격했을 것이다.
이런 다큐 형식이 늘어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우선 사회·환경·정치 문제처럼 현시대의 구체적인 상황을 예술로 기록하고, 관객에게 경각심을 주려는 시도일 수 있겠다. 기존의 기록 매체인 영상 다큐와 예술이 결합되면, 예술적 해석과 실질적 현장의 결합이라는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의 특성상 많은 정보를 전달해야 하다 보니, 작품 러닝타임이 길어지거나 내러티브가 복잡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전시장의 루프 형식과 맞물려, “어느 지점에서부터 봐야 하고, 어디까지 보는 게 맞는가”라는 문제는 아직도 큰 숙제로 남아있다.
게다가 다큐 형식은 방송사나 전문 다큐 제작자들이 이미 높은 수준으로 대중에게 선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작품이 이를 어떻게 차별화할지가 또 다른 숙제가 된다. 어쩌면 “TV에서 보는 다큐보다 어설프다”는 평가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큐 형식 작품이 지속적으로 보이는 것은, 작가가 현실 문제에 개입하고자 하는 예술적 열망과, 상업 미디어와는 다른 방식과 시선으로 기록하고 전달하려는 욕구가 교차하는 지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현상에서 또 다시 자본이라는 함수를 넣고 반추해 보면, 방송국의 대형 다큐멘터리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10여년 전의 프로그램이지만) ‘북극의 눈물’, ‘아마존의 눈물’ 같은 작품은 정확한 제작비를 알 순 없지만, 상당한 자본과 인력을 투입해 뛰어난 화면미와 스토리텔링을 보여주었다. 자연스럽게 시청자는 거대한 자연의 모습을 초고화질로 감상하면서, 동시에 환경 파괴나 기후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느끼게 되었다.
반면 전시장에서 만나는 예술 다큐는, 제작 여건이 훨씬 제한적일 때가 많다. 가령 비슷한 주제라도 화면의 해상도나 편집 기술, 촬영 규모 면에서 방송사 다큐와 비교될 수밖에 없다. 물론 예술 다큐가 꼭 자본력을 뽐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관객의 눈높이가 이미 완성도 높은 대중 매체에 길들여져 있다면, 예술 쪽 다큐는 상대적으로 부실하다는 느낌을 받을 위험이 있다. 그래서인지, 예술가들은 오히려 날것의 질감이나 느린 호흡 등 상업 다큐가 추구하지 않는 포맷으로 차별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또 작품에서 드러나는 메시지나 작가의 관점, 관객이 얻는 사유의 폭 등은 상업 다큐와 다른 방향으로 깊어질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전에, 관객이 실제 전시 현장에서 이를 제대로 체감하도록 만들려면, 앞서 말한 루프 방식과 긴 상영시간 등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한 고민이 더 먼저이지 않을까.
전시를 보며 드는 생각을 두서없이 나열하다보면, 슬프게도 이 문제들은 ‘나도’ 해결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본과 기술의 격차, 루프 상영의 난점, 새 매체의 미적 한계 등 온갖 문제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여전히 스스로의 길을 탐색(방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작품 한 편을 온전히 집중해 보려는 관객의 태도를 종용할 것인지, 작가에게 좀 더 짧고 임팩트 있는 편집을 기대해야할지 모르겠다. 결국 나 또한 관객에게 바라는 것은 (여건이 되든 안 되든) 이 작품에 머무르며 생각할 시간과 시선을 확보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의 삶은 늘 빠듯하고, 이미 상업 미디어에서 완성도 높은 경험을 제공받은 관객은 예술의 ‘결핍’을 쉽게 외면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술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들이 풀어야 할 숙제인 것이다. 결핍을 무기로 삼는 예술의 전략이 언제까지 유효할지, 상업 미디어와 다른 깊이를 어디까지 얼마나 담아낼 수 있을지는 확신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그런 고민을 계속 이어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예술의 가능성을 조금씩 넓혀가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싶다.
2025.03.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March.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