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 the Canvas Ep. 2 - 레지던시의 역설
박천, 시안미술관 학예실장
출처: 시안미술관
동시대 미술계에서 ‘탈중심’이라는 말은 이제 익숙함을 넘어 당연히 지향해야할 가치처럼 여겨지는 분위기가 짙어지고 있다. 이 개념은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던 미술사조가 서구 주도의 고전적 권력구조를 해체하려 시도하면서 본격적으로 부상했다. 유럽과 미국이라는 오랜 중심에서 벗어나, 다채로운 목소리를 존중하고 더 민주적인 예술 생태계를 만들자는 이상이 출발점이었다. 그런데 겉으로는 말 그대로 세계 미술계가 이러한 사상을 실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시아, 아프리카, 혹은 다양한 소수자 예술가들이 국제 무대에서 더욱 활발히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제도적 장치와 권력 구조는 여전히 견고하게 중심을 지키고 있다. 포스트식민주의 담론에서 말하듯이, 서구 제국주의 시대에 형성된 ‘중심-주변’ 구도가 단지 그 모습만 조금 바뀌었을 뿐, 실질적으로 해체되지 않았다는 진단과도 맞닿아 있다.
주지하듯이, ‘탈중심’을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주류로의 진입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탈중심이 강조될수록 중심부와 변방이 더욱 구분되는 양상이 벌어진다. 이러한 모순은 현대 미술의 대표적인 제도 중 하나인 레지던시(Artist Residency)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와 같은 현상 ‘구조적 양면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즉 제도적 표면에서 비서구권 혹은 타자화된 주체를 환대하는 듯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기존 권력을 재생산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국내외 레지던시가 갖는 명성과 인증 체계 또한 이 같은 경향에 적잖은 영향을 받고 있다.
초기의 레지던시는 예술가들에게 안정적인 창작 환경을 제공하려는 좋은 뜻에서 출발했다. 작가들이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작업에 몰두하도록 돕는 것이 주된 취지였다. 그런데 1960년대 이후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레지던시 역시 점차 변화의 흐름에 들어섰다. 특히 1990년대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의 ‘관계미학(Relational Aesthetics)’이 떠오르면서, 레지던시는 예술가의 개인적 창작을 넘어 지역사회와의 상호작용, 관객과의 관계 형성을 중요한 목표로 내세우게 되었다. 이는 무언가를 만드는 결과물 자체보다 과정을 중시하고, 이 과정 속에서 참여자 간의 유대와 경험이 핵심이 된다는 점을 강조한 흐름이었다.
관계미학의 등장은 참여 예술 담론 확장에도 크게 기여했다. 또한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은 참여형 예술에 내재한 정치성과 윤리적 딜레마를 언급하며, 예술 실천이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는지 비판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레지던시는 단지 개인 창작실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주민, 더 나아가서는 공공 영역과의 관계를 구축하는 플랫폼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레지던시는 지역사회와의 대화, 관객과의 소통, 공동체 사업처럼 복잡한 의제를 떠안게 되었다. 작가들은 이제 자신의 작품 세계에만 몰두하기보다, 공공 행사를 기획하거나 워크숍을 진행하는 등 추가적인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언뜻 보기에는 ‘탈중심’과 ‘관계’가 확장된 듯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작가가 원래 누려야 할 자율성이 제도적 요구에 갇히는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한편으로 국내 레지던시는 작가들이 미술계에서 공인받는 경로로 여겨지면서, 점점 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상징적 공간이 되었다. 이로 인해, 레지던시에 입주할 기회를 얻기 위한 또 다른 형태의 ‘중심-주변’ 경계가 생겨나는 역설이 발생한다.
지원금이나 운영기관의 구조적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레지던시는 본래 작가가 창작에만 전념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실제로는 기관의 요구사항(성과보고, 전시, 지역 참여 프로그램 등)을 충족해야만 한다. 이러한 성과주의적 운영 방식은 대외적 가시성을 강조하기에, 작가들에게 행정 업무와 홍보성 기획을 떠안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레지던시가 작가들의 창작을 온전히 보장하는 공간이라기보다, 일정한 공적 의무를 수행해야만 하는 ‘무대’로 변질되는 현상이 심화된다.
기관 입장에서는 레지던시에 할당된 예산을 지속적으로 확보해야 하므로, 자신들의 운영 성과를 수치화하거나 보고서로 제출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진다. 이 와중에, 지역사회와의 연대를 이룬다는 레지던시의 이념적 취지와, 실제로 작가들에게 부여되는 다중적 요구가 충돌하게 된다. 자본과 권력이 초국가적으로 흐르는 이 시대는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제국(Empire)’이 되어, 제도적 지원조차도 궁극적으로는 자본의 문법에 종속되어 있다. 이러한 규정을 설정한다면, 레지던시 운영도 이와 같은 구조적 압력 아래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더욱 깊이 문제를 들여다보면, 기관과 작가 사이에 레지던시의 목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운영 주체는 초창기부터 강조해온 ‘순수 창작 지원’과 ‘지역사회와의 협력’을 지속적으로 홍보하지만, 정작 작가들에게 레지던시는 해외 진출과 경력 관리에 중요한 발판으로 인식된다. 또 작가들은 국내, 나아가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 들어간 레지던시에서, 예상치 못한 관료적 장벽과 협업 프로젝트 의무 등을 마주하게 된다. 이는 결국 작가들로 하여금 레지던시가 이상적인 창작 공동체가 아니라, 엄격한 선발과 공적 부담이 주어지는 일종의 ‘계급 인증 통로’라는 인식을 갖게 만든다.
그렇다 하더라도, 레지던시는 여전히 동시대 미술 생태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작가가 새로운 장르를 실험하고, 지역사회가 문화적 활력을 얻으며, 기관도 자율성과 공공성을 아우르는 플랫폼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기회와 가치가 ‘경쟁’과 ‘인증’의 논리 안에서 상쇄되지 않도록, 작가와 기관이 공동 책임을 지는 새로운 방식의 제도적 설계가 요구된다. 지금까지 ‘대안’이라 불리던 예술 실천이 실제로 얼마만큼 대안적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재평가하고 재설계해야 하지 않을까?
레지던시는 작가에게 도움이 되면서도 또 다른 속박이 되기도 한다. 이 모순 속에서, 우리는 예술의 본질이 과연 무엇이며, 제도적 장치가 예술가에게 어떤 방식을 통해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꾸준히 대화하고 연구해야 할 것 같다. 현 시점에서 레지던시의 존재가치와 운영 논리를 다시금 정립한다면, 탈중심이 아니라 주변이 중심이 되는 동시대 미술 생태계의 구현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2025.04.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April.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Off the Canvas Ep. 2 - 레지던시의 역설
박천, 시안미술관 학예실장
출처: 시안미술관
동시대 미술계에서 ‘탈중심’이라는 말은 이제 익숙함을 넘어 당연히 지향해야할 가치처럼 여겨지는 분위기가 짙어지고 있다. 이 개념은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던 미술사조가 서구 주도의 고전적 권력구조를 해체하려 시도하면서 본격적으로 부상했다. 유럽과 미국이라는 오랜 중심에서 벗어나, 다채로운 목소리를 존중하고 더 민주적인 예술 생태계를 만들자는 이상이 출발점이었다. 그런데 겉으로는 말 그대로 세계 미술계가 이러한 사상을 실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시아, 아프리카, 혹은 다양한 소수자 예술가들이 국제 무대에서 더욱 활발히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제도적 장치와 권력 구조는 여전히 견고하게 중심을 지키고 있다. 포스트식민주의 담론에서 말하듯이, 서구 제국주의 시대에 형성된 ‘중심-주변’ 구도가 단지 그 모습만 조금 바뀌었을 뿐, 실질적으로 해체되지 않았다는 진단과도 맞닿아 있다.
주지하듯이, ‘탈중심’을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주류로의 진입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탈중심이 강조될수록 중심부와 변방이 더욱 구분되는 양상이 벌어진다. 이러한 모순은 현대 미술의 대표적인 제도 중 하나인 레지던시(Artist Residency)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와 같은 현상 ‘구조적 양면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즉 제도적 표면에서 비서구권 혹은 타자화된 주체를 환대하는 듯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기존 권력을 재생산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국내외 레지던시가 갖는 명성과 인증 체계 또한 이 같은 경향에 적잖은 영향을 받고 있다.
초기의 레지던시는 예술가들에게 안정적인 창작 환경을 제공하려는 좋은 뜻에서 출발했다. 작가들이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작업에 몰두하도록 돕는 것이 주된 취지였다. 그런데 1960년대 이후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레지던시 역시 점차 변화의 흐름에 들어섰다. 특히 1990년대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의 ‘관계미학(Relational Aesthetics)’이 떠오르면서, 레지던시는 예술가의 개인적 창작을 넘어 지역사회와의 상호작용, 관객과의 관계 형성을 중요한 목표로 내세우게 되었다. 이는 무언가를 만드는 결과물 자체보다 과정을 중시하고, 이 과정 속에서 참여자 간의 유대와 경험이 핵심이 된다는 점을 강조한 흐름이었다.
관계미학의 등장은 참여 예술 담론 확장에도 크게 기여했다. 또한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은 참여형 예술에 내재한 정치성과 윤리적 딜레마를 언급하며, 예술 실천이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는지 비판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레지던시는 단지 개인 창작실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주민, 더 나아가서는 공공 영역과의 관계를 구축하는 플랫폼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레지던시는 지역사회와의 대화, 관객과의 소통, 공동체 사업처럼 복잡한 의제를 떠안게 되었다. 작가들은 이제 자신의 작품 세계에만 몰두하기보다, 공공 행사를 기획하거나 워크숍을 진행하는 등 추가적인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언뜻 보기에는 ‘탈중심’과 ‘관계’가 확장된 듯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작가가 원래 누려야 할 자율성이 제도적 요구에 갇히는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한편으로 국내 레지던시는 작가들이 미술계에서 공인받는 경로로 여겨지면서, 점점 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상징적 공간이 되었다. 이로 인해, 레지던시에 입주할 기회를 얻기 위한 또 다른 형태의 ‘중심-주변’ 경계가 생겨나는 역설이 발생한다.
지원금이나 운영기관의 구조적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레지던시는 본래 작가가 창작에만 전념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실제로는 기관의 요구사항(성과보고, 전시, 지역 참여 프로그램 등)을 충족해야만 한다. 이러한 성과주의적 운영 방식은 대외적 가시성을 강조하기에, 작가들에게 행정 업무와 홍보성 기획을 떠안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레지던시가 작가들의 창작을 온전히 보장하는 공간이라기보다, 일정한 공적 의무를 수행해야만 하는 ‘무대’로 변질되는 현상이 심화된다.
기관 입장에서는 레지던시에 할당된 예산을 지속적으로 확보해야 하므로, 자신들의 운영 성과를 수치화하거나 보고서로 제출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진다. 이 와중에, 지역사회와의 연대를 이룬다는 레지던시의 이념적 취지와, 실제로 작가들에게 부여되는 다중적 요구가 충돌하게 된다. 자본과 권력이 초국가적으로 흐르는 이 시대는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제국(Empire)’이 되어, 제도적 지원조차도 궁극적으로는 자본의 문법에 종속되어 있다. 이러한 규정을 설정한다면, 레지던시 운영도 이와 같은 구조적 압력 아래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더욱 깊이 문제를 들여다보면, 기관과 작가 사이에 레지던시의 목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운영 주체는 초창기부터 강조해온 ‘순수 창작 지원’과 ‘지역사회와의 협력’을 지속적으로 홍보하지만, 정작 작가들에게 레지던시는 해외 진출과 경력 관리에 중요한 발판으로 인식된다. 또 작가들은 국내, 나아가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 들어간 레지던시에서, 예상치 못한 관료적 장벽과 협업 프로젝트 의무 등을 마주하게 된다. 이는 결국 작가들로 하여금 레지던시가 이상적인 창작 공동체가 아니라, 엄격한 선발과 공적 부담이 주어지는 일종의 ‘계급 인증 통로’라는 인식을 갖게 만든다.
그렇다 하더라도, 레지던시는 여전히 동시대 미술 생태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작가가 새로운 장르를 실험하고, 지역사회가 문화적 활력을 얻으며, 기관도 자율성과 공공성을 아우르는 플랫폼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기회와 가치가 ‘경쟁’과 ‘인증’의 논리 안에서 상쇄되지 않도록, 작가와 기관이 공동 책임을 지는 새로운 방식의 제도적 설계가 요구된다. 지금까지 ‘대안’이라 불리던 예술 실천이 실제로 얼마만큼 대안적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재평가하고 재설계해야 하지 않을까?
레지던시는 작가에게 도움이 되면서도 또 다른 속박이 되기도 한다. 이 모순 속에서, 우리는 예술의 본질이 과연 무엇이며, 제도적 장치가 예술가에게 어떤 방식을 통해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꾸준히 대화하고 연구해야 할 것 같다. 현 시점에서 레지던시의 존재가치와 운영 논리를 다시금 정립한다면, 탈중심이 아니라 주변이 중심이 되는 동시대 미술 생태계의 구현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2025.04.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April.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