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 the Canvas Ep. 3 - 나는 축구를 보지 않는다.
박천, 시안미술관 학예실장
출처: 뉴시스
나는 축구 경기를 거의 챙겨보지 않는 편이다. 특별히 좋아하는 스포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미술을 시작하면서는 취미랄 것도 없는 삶을 살아왔다. 가끔 하이라이트 영상을 통해 손흥민 선수가 골을 넣었을 때 “오, 대단하네” 하고 지나가는 정도, 월드컵 기간이 되면 주변 분위기에 휩쓸려 살짝 관심을 두는 정도가 전부였다(2002년은 예외적으로 엄청 열광했었다). 그런데 최근 월드컵 예선이 있었다는 걸 지인과의 대화에서 듣고는, “내가 이 정도로 무심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인에게는 알고 있는 척은 했다.
조금 더 곱씹어 보면, 작년부터 이어진 체육계의 협회 관련 잡음이 내 미약한 관심마저 흩어놓은 것 같다. 요즘은 한풀 잦아든 듯 보이지만, 한동안 언론에서 체육계의 협회 문제를 지속적으로 다루면서 선수 선발 과정의 불투명성, 내부 권력 구조의 문제 등이 거론되었다. 스포츠에 큰 흥미가 없어도, 이런 소식을 접하다 보면 “왜 저런 사람들이 단체를 운영하는 걸까?”라는 의문이 커질 수밖에 없다. 내부적인 사정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문제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의 발언은 설득력이 없었던 기억이 진하게 남아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가 몸 담고 있는 미술계가 떠올랐다. 미술계에도 여러 미술 협회가 존재하고, 지역마다 혹은 협회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사업을 펼치고 있는데, 이러한 협회들 가운데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곳도 있고, 비교적 최근에 신설된 단체들도 있다. 하지만 요즘 현장에서 작가들이나 기획자들과 대화해 보면 “어느 협회에 가입했느냐”와 같은 질문을 거의 듣지 못한다. 옛날 옛날에는 전시 기회나 공모전 혜택을 얻으려면 협회 가입이 필수 통로였지만, 이제는 개인 역량만으로도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는 길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협회가 전혀 무용하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미술협회가 생겨난 배경을 살펴보면, 작가들이 개별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제도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공동체적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나 지자체가 문화 예산을 투입할 때 작가들의 의견을 일괄적으로 수렴하고, 전시 기회를 ‘균등’하게 보장하며, 저작권 및 창작활동과 같은 권익을 보호하는 창구로서 활약해 온 것이 협회의 긍정적 역할이었다. 지금과 같이 기관이나 지자체의 지원이 거의 없던 시절에는, 협회 주도로 공공 미술 사업을 끌어오거나 대형 전시를 진행해 지역 예술 생태계를 활성화한 사례도 적지 않다.
문제는 협회가 주관하는 사업 상당수가 협회 회원에게만 참여 자격을 부여하는 구조일 때가 많다는 점이다. 많은 단체들이 ‘회원만을 위한’ 공모전이나 전시, 프로젝트를 고수하면서 정작 외부인이나 신진 작가들이 쉽게 진입하기 어려운 장벽을 만들어 왔다. 또 어떤 곳은 주력 전시 지원에 대해 대기 순번까지 존재해 권력 구조가 더욱 견고해지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폐쇄적인 운영 방식이 협회의 발전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고, 젊은 예술인이 협회와 멀어지는 현상을 가속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협회는 왜 생겨났으며, 어떤 방향성을 가져야 할까? 미술사 전반을 돌아보면, 예술가들이 동료들과 모여 조직적인 활동을 펼친 사례는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19세기 말 인상주의 작가들이 보수적인 살롱에 맞서 직접 그룹을 만들고 전시를 개최했던 일, 이후 다양한 사조(ism)들이 동료 예술가와 이론가가 합심해 자신들의 작품세계를 지켜내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 간 역사는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런 맥락이 오늘날의 미술협회의 근간이 되었고, 체육계의 협회처럼 작가들의 권익을 대변하고 제도적 개선을 추진해 온 긍정적 공로도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내부 운영이 불투명하고 의사결정이 경직되었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수 많은 회원들의 회비로 구성되는 예산이 어떻게 편성되는지, 지원사업 선정은 어떤 기준으로 이루어지는지 등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의심의 눈초리로 볼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가 된다.
예산 문제를 떠나 전시를 보자면, 협회가 주도하는 교류전이나 정기전(회원전)은 정작 작가 간의 교류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조금 아이러니한 일이다. 내가 협회의 전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어깨 넘어로 지켜봤을 때, 협회 측은 전시 장소와 기간을 확정한 뒤, 회원들에게 일괄적으로 (웹하드에) 출품 신청을 받고, 작품을 빼곡하게 걸어 두는 방식으로 진행하는데, 큐레이션이 거의 이뤄지지 않다 보니 서로 다른 맥락의 작업들이 무질서하게 뒤섞여 관객이 감상하기 쉽지 않아 진다. 작가들끼리도 작품에 대한 토론이나 워크숍 기회를 찾기 어렵고, 작품만 내고 마는 식의 결과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관객 역시 왜 이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는지 알 길이 없으므로 그냥 ○○협회에는 이런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만다. 재미있게도 명제표에 작가의 사진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대부분의 정기전은 아무런 메시지가 없고, 국제 교류든 지역 간의 교류든 ‘교류전’에서는 교류가 없다. 단지 협회의 사업이 올해도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행정적 증명만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지역 미술협회의 경우, 이러한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도심에서 벗어난 지역으로 갈수록 전문 인력이 부족하고, 다른 지역과 교류할 통로가 원활하지 않아 협회 중심의 권력이 더 크게 작동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시·군 단위에 자리 잡은 협회가 지역 공무원들과 긴밀하게 연결돼, 사업 선정이나 예산 편성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독립 큐레이터나 외부 작가들이 참여하려 해도 협회가 받아들이지 않기에, 결국 ‘외부인의 유입’이 막혀버리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반면 모범 사례도 있는데, A지역의 미술협회가 인접 도시에 자리 잡은 대안공간의 기획자와의 교류를 통해 주제전 형태로 작품을 전시하고 예술인 교류 세미나를 주최하는 식으로 네트워크를 활성화한 사례가 있다. 전문가 부족 문제를 인접 도시 기획자와의 협업으로 보완하고, 공무원들에게도 ‘이렇게 교류하면 지역 미술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설득해 예산 지원을 유도한 것이다. 이처럼 지역 협회도 의지만 있으면 외부와 교류하고, 전문 인력을 끌어들여 공동 전시를 기획하는 등 다양하게 협업 방식을 모색할 수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에 보도된 갤러리K 사기 사건은 협회의 공신력을 더욱 실추하는 사건이 되었다. 갤러리K 측이 예술 재테크, 즉 ‘아트테크’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분할 구매하게 하고, 기업에 렌탈해 얻은 수익금을 나눠주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들였지만, 실제로는 폰지사기 구조에 가까웠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특히 문제가 된 건, 이들이 ‘협회가 보증한 감정서’를 근거로 “이 작품은 ○○원의 가치가 있다”고 홍보했다는 점이다. 화랑(갤러리)이나 경매씬에서는 경력과 전시 이력, 시장 내 거래 사례 등을 종합해 작가별 판매 성과나 브랜드 파워까지 고려해 작품 가치를 평가한다. 물론 완벽히 규칙적이지는 않아도, 대략적인 시세를 참고하는 흐름이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협회가 발행하는 감정서는 이런 시장 논리와 동떨어져, ‘몇 년 경력의 회원이니 작품 값은 얼마 정도가 된다’는 식으로 산정되는 방식이었다. 결국 판매 이력이나 시장 인지도와 무관한 절차로 ‘가격 감정’이 이뤄진 것이고, 협회는 스스로의 능력 범위를 넘어서는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가격을 믿고 투자했다가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를 겪으며, 협회의 존재 이유에 대한 질문과 협회를 아예 없애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도 젊은 층에서는 종종 나오지만, 체육협회와 마찬가지로 미술협회가 완전히 해체되면 국가나 지자체가 대규모 예술행사를 기획하거나 예술정책을 수립할 때 작가들의 목소리를 받아낼 통로가 사라진다는 문제가 생긴다. 관(官) 입장에서는 ‘협회가 곧 전문가’와 같은 등식이 성립되어 있기도 하고, 여전히 일정 규모 이상의 단체와 협의하는 편이 다양한 방면에서 행정적으로 편리하기 때문이다.
결국 협회를 없애기보다는 투명성과 전문성을 높이고, 폐쇄적인 사업 구조를 개선하며, 지역마다 전문 인력이 부족하다는 현실을 직시한 뒤 외부 교류를 더 적극적으로 꾀하는 방향이 필요해 보인다. 회원에게만 문을 여는 사업이 아니라, 신진 작가나 다른 지역의 예술인도 쉽게 참여할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해 교류 기회를 확장해야 하지 않을까. 전시 기획 또한 작품을 모아놓는 수준에서 벗어나, 실제로 작가들이 서로의 작업세계를 토론하고, 관객이 통일된 메시지를 느낄 수 있도록 돕는 체계가 마련된다면 너무 좋겠지만, 글을 쓰면서도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느껴지는 것은 기분탓일 것이다.
나는 축구 하이라이트조차 잘 챙겨보지 않는 무심한 사람이지만, 체육협회를 둘러싼 문제들을 보면서 공신력이라는 이름의 조직이 불투명하게 운영되면 대중이 빠르게 등을 돌린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미술계도 이 문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교류 없는 교류전, 근거 없는 감정서, 의사소통 없이 흘러가는 운영 시스템이 반복되면 작가나 관객 모두 협회를 외면하게 될 것이다. 만약 이러한 문제가 계속된다면, 내가 축구를 보지 않는 것처럼, 관객들은 전시를 보지 않을 것이다.
2025.05.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May.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Off the Canvas Ep. 3 - 나는 축구를 보지 않는다.
박천, 시안미술관 학예실장
출처: 뉴시스
나는 축구 경기를 거의 챙겨보지 않는 편이다. 특별히 좋아하는 스포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미술을 시작하면서는 취미랄 것도 없는 삶을 살아왔다. 가끔 하이라이트 영상을 통해 손흥민 선수가 골을 넣었을 때 “오, 대단하네” 하고 지나가는 정도, 월드컵 기간이 되면 주변 분위기에 휩쓸려 살짝 관심을 두는 정도가 전부였다(2002년은 예외적으로 엄청 열광했었다). 그런데 최근 월드컵 예선이 있었다는 걸 지인과의 대화에서 듣고는, “내가 이 정도로 무심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인에게는 알고 있는 척은 했다.
조금 더 곱씹어 보면, 작년부터 이어진 체육계의 협회 관련 잡음이 내 미약한 관심마저 흩어놓은 것 같다. 요즘은 한풀 잦아든 듯 보이지만, 한동안 언론에서 체육계의 협회 문제를 지속적으로 다루면서 선수 선발 과정의 불투명성, 내부 권력 구조의 문제 등이 거론되었다. 스포츠에 큰 흥미가 없어도, 이런 소식을 접하다 보면 “왜 저런 사람들이 단체를 운영하는 걸까?”라는 의문이 커질 수밖에 없다. 내부적인 사정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문제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의 발언은 설득력이 없었던 기억이 진하게 남아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가 몸 담고 있는 미술계가 떠올랐다. 미술계에도 여러 미술 협회가 존재하고, 지역마다 혹은 협회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사업을 펼치고 있는데, 이러한 협회들 가운데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곳도 있고, 비교적 최근에 신설된 단체들도 있다. 하지만 요즘 현장에서 작가들이나 기획자들과 대화해 보면 “어느 협회에 가입했느냐”와 같은 질문을 거의 듣지 못한다. 옛날 옛날에는 전시 기회나 공모전 혜택을 얻으려면 협회 가입이 필수 통로였지만, 이제는 개인 역량만으로도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는 길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협회가 전혀 무용하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미술협회가 생겨난 배경을 살펴보면, 작가들이 개별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제도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공동체적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나 지자체가 문화 예산을 투입할 때 작가들의 의견을 일괄적으로 수렴하고, 전시 기회를 ‘균등’하게 보장하며, 저작권 및 창작활동과 같은 권익을 보호하는 창구로서 활약해 온 것이 협회의 긍정적 역할이었다. 지금과 같이 기관이나 지자체의 지원이 거의 없던 시절에는, 협회 주도로 공공 미술 사업을 끌어오거나 대형 전시를 진행해 지역 예술 생태계를 활성화한 사례도 적지 않다.
문제는 협회가 주관하는 사업 상당수가 협회 회원에게만 참여 자격을 부여하는 구조일 때가 많다는 점이다. 많은 단체들이 ‘회원만을 위한’ 공모전이나 전시, 프로젝트를 고수하면서 정작 외부인이나 신진 작가들이 쉽게 진입하기 어려운 장벽을 만들어 왔다. 또 어떤 곳은 주력 전시 지원에 대해 대기 순번까지 존재해 권력 구조가 더욱 견고해지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폐쇄적인 운영 방식이 협회의 발전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고, 젊은 예술인이 협회와 멀어지는 현상을 가속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협회는 왜 생겨났으며, 어떤 방향성을 가져야 할까? 미술사 전반을 돌아보면, 예술가들이 동료들과 모여 조직적인 활동을 펼친 사례는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19세기 말 인상주의 작가들이 보수적인 살롱에 맞서 직접 그룹을 만들고 전시를 개최했던 일, 이후 다양한 사조(ism)들이 동료 예술가와 이론가가 합심해 자신들의 작품세계를 지켜내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 간 역사는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런 맥락이 오늘날의 미술협회의 근간이 되었고, 체육계의 협회처럼 작가들의 권익을 대변하고 제도적 개선을 추진해 온 긍정적 공로도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내부 운영이 불투명하고 의사결정이 경직되었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수 많은 회원들의 회비로 구성되는 예산이 어떻게 편성되는지, 지원사업 선정은 어떤 기준으로 이루어지는지 등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의심의 눈초리로 볼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가 된다.
예산 문제를 떠나 전시를 보자면, 협회가 주도하는 교류전이나 정기전(회원전)은 정작 작가 간의 교류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조금 아이러니한 일이다. 내가 협회의 전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어깨 넘어로 지켜봤을 때, 협회 측은 전시 장소와 기간을 확정한 뒤, 회원들에게 일괄적으로 (웹하드에) 출품 신청을 받고, 작품을 빼곡하게 걸어 두는 방식으로 진행하는데, 큐레이션이 거의 이뤄지지 않다 보니 서로 다른 맥락의 작업들이 무질서하게 뒤섞여 관객이 감상하기 쉽지 않아 진다. 작가들끼리도 작품에 대한 토론이나 워크숍 기회를 찾기 어렵고, 작품만 내고 마는 식의 결과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관객 역시 왜 이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는지 알 길이 없으므로 그냥 ○○협회에는 이런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만다. 재미있게도 명제표에 작가의 사진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대부분의 정기전은 아무런 메시지가 없고, 국제 교류든 지역 간의 교류든 ‘교류전’에서는 교류가 없다. 단지 협회의 사업이 올해도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행정적 증명만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지역 미술협회의 경우, 이러한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도심에서 벗어난 지역으로 갈수록 전문 인력이 부족하고, 다른 지역과 교류할 통로가 원활하지 않아 협회 중심의 권력이 더 크게 작동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시·군 단위에 자리 잡은 협회가 지역 공무원들과 긴밀하게 연결돼, 사업 선정이나 예산 편성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독립 큐레이터나 외부 작가들이 참여하려 해도 협회가 받아들이지 않기에, 결국 ‘외부인의 유입’이 막혀버리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반면 모범 사례도 있는데, A지역의 미술협회가 인접 도시에 자리 잡은 대안공간의 기획자와의 교류를 통해 주제전 형태로 작품을 전시하고 예술인 교류 세미나를 주최하는 식으로 네트워크를 활성화한 사례가 있다. 전문가 부족 문제를 인접 도시 기획자와의 협업으로 보완하고, 공무원들에게도 ‘이렇게 교류하면 지역 미술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설득해 예산 지원을 유도한 것이다. 이처럼 지역 협회도 의지만 있으면 외부와 교류하고, 전문 인력을 끌어들여 공동 전시를 기획하는 등 다양하게 협업 방식을 모색할 수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에 보도된 갤러리K 사기 사건은 협회의 공신력을 더욱 실추하는 사건이 되었다. 갤러리K 측이 예술 재테크, 즉 ‘아트테크’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분할 구매하게 하고, 기업에 렌탈해 얻은 수익금을 나눠주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들였지만, 실제로는 폰지사기 구조에 가까웠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특히 문제가 된 건, 이들이 ‘협회가 보증한 감정서’를 근거로 “이 작품은 ○○원의 가치가 있다”고 홍보했다는 점이다. 화랑(갤러리)이나 경매씬에서는 경력과 전시 이력, 시장 내 거래 사례 등을 종합해 작가별 판매 성과나 브랜드 파워까지 고려해 작품 가치를 평가한다. 물론 완벽히 규칙적이지는 않아도, 대략적인 시세를 참고하는 흐름이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협회가 발행하는 감정서는 이런 시장 논리와 동떨어져, ‘몇 년 경력의 회원이니 작품 값은 얼마 정도가 된다’는 식으로 산정되는 방식이었다. 결국 판매 이력이나 시장 인지도와 무관한 절차로 ‘가격 감정’이 이뤄진 것이고, 협회는 스스로의 능력 범위를 넘어서는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가격을 믿고 투자했다가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를 겪으며, 협회의 존재 이유에 대한 질문과 협회를 아예 없애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도 젊은 층에서는 종종 나오지만, 체육협회와 마찬가지로 미술협회가 완전히 해체되면 국가나 지자체가 대규모 예술행사를 기획하거나 예술정책을 수립할 때 작가들의 목소리를 받아낼 통로가 사라진다는 문제가 생긴다. 관(官) 입장에서는 ‘협회가 곧 전문가’와 같은 등식이 성립되어 있기도 하고, 여전히 일정 규모 이상의 단체와 협의하는 편이 다양한 방면에서 행정적으로 편리하기 때문이다.
결국 협회를 없애기보다는 투명성과 전문성을 높이고, 폐쇄적인 사업 구조를 개선하며, 지역마다 전문 인력이 부족하다는 현실을 직시한 뒤 외부 교류를 더 적극적으로 꾀하는 방향이 필요해 보인다. 회원에게만 문을 여는 사업이 아니라, 신진 작가나 다른 지역의 예술인도 쉽게 참여할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해 교류 기회를 확장해야 하지 않을까. 전시 기획 또한 작품을 모아놓는 수준에서 벗어나, 실제로 작가들이 서로의 작업세계를 토론하고, 관객이 통일된 메시지를 느낄 수 있도록 돕는 체계가 마련된다면 너무 좋겠지만, 글을 쓰면서도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느껴지는 것은 기분탓일 것이다.
나는 축구 하이라이트조차 잘 챙겨보지 않는 무심한 사람이지만, 체육협회를 둘러싼 문제들을 보면서 공신력이라는 이름의 조직이 불투명하게 운영되면 대중이 빠르게 등을 돌린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미술계도 이 문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교류 없는 교류전, 근거 없는 감정서, 의사소통 없이 흘러가는 운영 시스템이 반복되면 작가나 관객 모두 협회를 외면하게 될 것이다. 만약 이러한 문제가 계속된다면, 내가 축구를 보지 않는 것처럼, 관객들은 전시를 보지 않을 것이다.
2025.05.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May.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