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도 이제부터 능수능란
좋겠다, 큐레이터라서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Younggi Kim (Deputy Director, OCI Museum of Art)
‘가장 보람을 느낄 때’라면, 나 또한 틀에 박힌 여느 대답을 할 것이다. 전시를 성공적으로 열어 작가도 관객도 놀라고 유레카할 때, 세상의 일부를 바꾼 것 같아 흐뭇하다. 그런데, “이 직업의 장점이 뭐야?” 묻는다면, 그건 조금 다른 질문이다.
전시 기획자를 '큐레이터'라 칭하겠다. 일단 큐레이터의 역할이나 지분, 비중 이슈에서 난 일관되게 지금도 꽤나 소극적인 입장이다. 알수록, 클수록 더 조심스럽다. 작업 내적인 부분에 영향을 줄까 늘 신경 쓴다. 안목과 역량이 넘치는 큐레이터가 작가 활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 더 나은 결과가 나올까? 그럴 확률이 유의미하게 높다. 그리고 그게 맞은, 옳은, 바람직한 건지는 모르겠다. 공평하지 않은 거야 말할 것도 없겠고. 그런데 이제부터 내가 할 이야기는, 자칫 어리둥절할지 몰라도, 큐레이터의 매우 적극적인 면모이다.
전시와 작업은 다르다. 작품 제작이 완료되었다고 태어난 게 아니다. 비유하자면 흠결 없이 예쁜 알을 힘들여 이제 하나 낳은 것이다. 수정에 실패할 수도 있다. 자칫 깨질 수도, 먼지 쌓여 잊히고, 손쓸 틈 없이 썩어버릴 수도 있다. 작업실에서 창고에서 품으며 때를 가늠하다 세상에 나오는 순간에야 비로소 태어난다. 전시는 '작품의 출산'이다. 말하자면 큐레이터는 산파이고, 관객은 탄생의 순간을 경배하는 동방박사들인 셈이다.
그럼 그 전시란 건 어떻게 생겨먹었을까? 전시란 작업의 나열이 아니다. 작업을 잇고 엮는 것도 아니다. 간잽이 소금 치듯, 겉멋이라도 그럴싸하게 양념을 바르는 건 더욱 아니다. 복잡하면 몰입할 여유를 비추고, 심오함이 과할 때 간명함과 직관을 깔아주고, 강렬하면 주변을 달래고, 약할까 모여라 다독이고, 지나치면 단호함을 휘두르는 모든 상상과 결단이 전시 준비이고 전시 그 자체이다. 관객은 그 결단을 맛보는 식객들. 따라서 큐레이터는 작품이 제대로 반짝일 모든 궁리의 주체이자, 적극적 설계자이다.
혹자는 전달력이 미약하거나 난해함에 외면당하면 그 또한 작가 역량의 한계 아니냐 한다. 알을 낳고 품는 시기까진 분명 그러하다. 다만, 깨어 세상에 나오는 순간, 큐레이터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묻지도 않고 세상에 잡아다 꺼냈으니 책임이 있는, 이 땅의 모든 부모'가 문득 떠오른다. 알아서 와닿는 작품은 좋은 작품이다. 그리고 그렇지 않을 때 "현대 미술은 어렵다"고들 한다. 그 말에 답이 있다. '작품=미술'이 아니다. 현대 미술, 특히 동시대 미술에서 작품은 하고많은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마침 작품이 주연을 맡은 완결된 총체적 상품이나 시스템을 소비하는 게 바로 미술이다. 달랑 그림만 떠올리는 건, 마치 목적지 빼고 나머진 다 지운 지도를 보는 격이다. 갈 일 볼 일 없다고, 상관도 필요도 없는 게 아니다. 다 떼고 달랑 그것만 보고, 따로 보고, 뒤죽박죽 설피 보고 뒤늦게 보니, 그 놈의 현대 미술 어렵지 않은 게 더 이상하다. 그렇게 관심 하나가 또 저 멀리 훨훨 날아간다.
머리, 가슴, 배를 이어 붙인 들 산 곤충과 어찌 같을까? 브루노 마스와 레이디 가가의 듀엣곡 <Die with a Smile>을 하루에 10초씩 들으면, 천 년을 들어도 그 감동이 아닐 것이다. 부분의 합과 전체를 견주어, 대소가 무색하고 애초에 '다른', 그런 뗄 수 없는 엮임을 '총체성'이라 한다. 동시대 미술은 총체성의 예술이다. 앞서 '제대로 반짝이는 작품'은 말하자면 총체성을 획득한 셈이다. 미술씬의 총체성을 책임지는 이가 바로 큐레이터이다. 반짝이지도 와닿지도 않는 게, 작품 그 자체일 순 있어도 미술이면 쓰나. 관심의 총량은 땅 속의 석유나 이 글 독자들의 잔고처럼 유한하고, 경쟁 상대가 될 재밌는 콘텐츠는 늘어만 간다. 그 귀한 관심을 허투루 헤피 날려버렸다간 무슨 몹쓸 죄인이 되게. 미술씬은 늘 ‘관종’이어야 하고, 그 고삐를 쥔 마부가 바로 큐레이터이다.
서두가 길었다. 그렇게 큐레이터는 총체적 설계자인 만큼, 작업 내적이든, 외적으로든 인문학적 통찰을 자주, 널리, 깊이, 많이 접한다. 좋든 싫든. 이를테면, '상대가 누구든, 의사든 큐레이터든 아니면 어느 이름 모를 시골 구석의 편의점 알바생이든, 상대를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을 향한 존중이 없는 사람'이다. 어째서? 내가 반짝이면, 그런 빛나는 사람을 케어하고 함께 고민하고 무언가를 주고받는 이는 얼마나 눈부신 사람일까? 반대로 내가 쓰레기면, 끽해야 그런 쓰레기에 목매는 자는 대체 얼마나 볼품없을까? 혼자이든 함께이든 이런 통찰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주치는 게 바로, 큐레이터란 직업의 유난한 장점이다. 누군가에겐 도무지 장점일까 싶겠지만. 아무튼 대충 문화인류학자, 정신과 의사, 사회부 기자, 다큐멘터리 PD, 오지 탐험가를 다 합한 정도이지 않을까?
단언하는 이유는 큐레이터가 마주하는 대부분의 통찰은 이미 날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도로 증류하고 정련한, 그리고 다음달 광고 예정인, 준 완성품이다. 반복적으로 통찰하는 여느 직업이 맨땅을 긁고 파 반짝이는 금을 캔다면, 큐레이터는 읍내 금은방 언니 포지션이다. 그리고 각자의 비법으로 별 해괴한 금붙이 만들어 오는 작가 손님들 맞이하랴 연금술사 사짜들 짝퉁 거르랴 오늘도 분주하다.
2025.07.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uly.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인터뷰도 이제부터 능수능란
좋겠다, 큐레이터라서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Younggi Kim (Deputy Director, OCI Museum of Art)
‘가장 보람을 느낄 때’라면, 나 또한 틀에 박힌 여느 대답을 할 것이다. 전시를 성공적으로 열어 작가도 관객도 놀라고 유레카할 때, 세상의 일부를 바꾼 것 같아 흐뭇하다. 그런데, “이 직업의 장점이 뭐야?” 묻는다면, 그건 조금 다른 질문이다.
전시 기획자를 '큐레이터'라 칭하겠다. 일단 큐레이터의 역할이나 지분, 비중 이슈에서 난 일관되게 지금도 꽤나 소극적인 입장이다. 알수록, 클수록 더 조심스럽다. 작업 내적인 부분에 영향을 줄까 늘 신경 쓴다. 안목과 역량이 넘치는 큐레이터가 작가 활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 더 나은 결과가 나올까? 그럴 확률이 유의미하게 높다. 그리고 그게 맞은, 옳은, 바람직한 건지는 모르겠다. 공평하지 않은 거야 말할 것도 없겠고. 그런데 이제부터 내가 할 이야기는, 자칫 어리둥절할지 몰라도, 큐레이터의 매우 적극적인 면모이다.
전시와 작업은 다르다. 작품 제작이 완료되었다고 태어난 게 아니다. 비유하자면 흠결 없이 예쁜 알을 힘들여 이제 하나 낳은 것이다. 수정에 실패할 수도 있다. 자칫 깨질 수도, 먼지 쌓여 잊히고, 손쓸 틈 없이 썩어버릴 수도 있다. 작업실에서 창고에서 품으며 때를 가늠하다 세상에 나오는 순간에야 비로소 태어난다. 전시는 '작품의 출산'이다. 말하자면 큐레이터는 산파이고, 관객은 탄생의 순간을 경배하는 동방박사들인 셈이다.
그럼 그 전시란 건 어떻게 생겨먹었을까? 전시란 작업의 나열이 아니다. 작업을 잇고 엮는 것도 아니다. 간잽이 소금 치듯, 겉멋이라도 그럴싸하게 양념을 바르는 건 더욱 아니다. 복잡하면 몰입할 여유를 비추고, 심오함이 과할 때 간명함과 직관을 깔아주고, 강렬하면 주변을 달래고, 약할까 모여라 다독이고, 지나치면 단호함을 휘두르는 모든 상상과 결단이 전시 준비이고 전시 그 자체이다. 관객은 그 결단을 맛보는 식객들. 따라서 큐레이터는 작품이 제대로 반짝일 모든 궁리의 주체이자, 적극적 설계자이다.
혹자는 전달력이 미약하거나 난해함에 외면당하면 그 또한 작가 역량의 한계 아니냐 한다. 알을 낳고 품는 시기까진 분명 그러하다. 다만, 깨어 세상에 나오는 순간, 큐레이터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묻지도 않고 세상에 잡아다 꺼냈으니 책임이 있는, 이 땅의 모든 부모'가 문득 떠오른다. 알아서 와닿는 작품은 좋은 작품이다. 그리고 그렇지 않을 때 "현대 미술은 어렵다"고들 한다. 그 말에 답이 있다. '작품=미술'이 아니다. 현대 미술, 특히 동시대 미술에서 작품은 하고많은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마침 작품이 주연을 맡은 완결된 총체적 상품이나 시스템을 소비하는 게 바로 미술이다. 달랑 그림만 떠올리는 건, 마치 목적지 빼고 나머진 다 지운 지도를 보는 격이다. 갈 일 볼 일 없다고, 상관도 필요도 없는 게 아니다. 다 떼고 달랑 그것만 보고, 따로 보고, 뒤죽박죽 설피 보고 뒤늦게 보니, 그 놈의 현대 미술 어렵지 않은 게 더 이상하다. 그렇게 관심 하나가 또 저 멀리 훨훨 날아간다.
머리, 가슴, 배를 이어 붙인 들 산 곤충과 어찌 같을까? 브루노 마스와 레이디 가가의 듀엣곡 <Die with a Smile>을 하루에 10초씩 들으면, 천 년을 들어도 그 감동이 아닐 것이다. 부분의 합과 전체를 견주어, 대소가 무색하고 애초에 '다른', 그런 뗄 수 없는 엮임을 '총체성'이라 한다. 동시대 미술은 총체성의 예술이다. 앞서 '제대로 반짝이는 작품'은 말하자면 총체성을 획득한 셈이다. 미술씬의 총체성을 책임지는 이가 바로 큐레이터이다. 반짝이지도 와닿지도 않는 게, 작품 그 자체일 순 있어도 미술이면 쓰나. 관심의 총량은 땅 속의 석유나 이 글 독자들의 잔고처럼 유한하고, 경쟁 상대가 될 재밌는 콘텐츠는 늘어만 간다. 그 귀한 관심을 허투루 헤피 날려버렸다간 무슨 몹쓸 죄인이 되게. 미술씬은 늘 ‘관종’이어야 하고, 그 고삐를 쥔 마부가 바로 큐레이터이다.
서두가 길었다. 그렇게 큐레이터는 총체적 설계자인 만큼, 작업 내적이든, 외적으로든 인문학적 통찰을 자주, 널리, 깊이, 많이 접한다. 좋든 싫든. 이를테면, '상대가 누구든, 의사든 큐레이터든 아니면 어느 이름 모를 시골 구석의 편의점 알바생이든, 상대를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을 향한 존중이 없는 사람'이다. 어째서? 내가 반짝이면, 그런 빛나는 사람을 케어하고 함께 고민하고 무언가를 주고받는 이는 얼마나 눈부신 사람일까? 반대로 내가 쓰레기면, 끽해야 그런 쓰레기에 목매는 자는 대체 얼마나 볼품없을까? 혼자이든 함께이든 이런 통찰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주치는 게 바로, 큐레이터란 직업의 유난한 장점이다. 누군가에겐 도무지 장점일까 싶겠지만. 아무튼 대충 문화인류학자, 정신과 의사, 사회부 기자, 다큐멘터리 PD, 오지 탐험가를 다 합한 정도이지 않을까?
단언하는 이유는 큐레이터가 마주하는 대부분의 통찰은 이미 날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도로 증류하고 정련한, 그리고 다음달 광고 예정인, 준 완성품이다. 반복적으로 통찰하는 여느 직업이 맨땅을 긁고 파 반짝이는 금을 캔다면, 큐레이터는 읍내 금은방 언니 포지션이다. 그리고 각자의 비법으로 별 해괴한 금붙이 만들어 오는 작가 손님들 맞이하랴 연금술사 사짜들 짝퉁 거르랴 오늘도 분주하다.
2025.07.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uly.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