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 럭키비키잖앙🍀
박천, 시안미술관 학예실장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봄꽃이 지고 초록이 짙어지는, 봄과 여름의 경계쯤이었던 같다. 어느 날 나는 처음으로 ‘럭키비키’라는 말을 들었다. 어감이 묘하게 입에 착 감겼다. 처음에는 장난스럽게 흘려들었지만, 상대적으로 젊은 지인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어느새 “럭키비키잖아”라고 말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게 젊은 지인들과는 그들과 같은 문화를 향유하는 것처럼, 비슷한 또래의 지인들에게는 젊음과 트렌드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유세를 떨며 전파하듯 떠들고 다녔다. 럭키비키를 외치는 순간, 나를 곤란하게 만든 상황은 물론이고, 작은 실수나 놓친 스케줄에 대해서도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던 어느 날, 이 표현에서 찝찝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 찝찝함은 스스로를 젊어 보이도록 만들겠다는 욕망 때문만은 아니었다. 럭키비키라는 말에 내가 기대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위로처럼 다가왔던 이 말이, 점점 무언의 요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무언의 요구 뒤에는 나를 압박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리해 보면, ‘긍정해도 괜찮아!’와 ‘지금 당장 긍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가 대립된 기호로 공존했던 것이다. 결국 이 말은 나에게 위로로 끝나지 않았고, 나는 이 말을 외칠 때마다 스스로에게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럭키비키는 나에게 긍정을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상하게도 이 말이 입에서 내뱉어질수록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도 스스로 긍정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내 안에서 커지고 있었다. 작은 실수를 변명하는 가벼운 농담 같았던 이 말이, 어느샌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질문이 생겼다. 이 긍정의 언어는 나(우리)를 위로하는 것일까, 아니면 더 큰 압박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럭키비키라는 말은 내게 자책하지 않을 위로를 주었지만, 한편으로 어려움 속에서조차 긍정을 찾아내야 한다는 또 다른 의무를 던졌다. 바꿔서 생각해 보면,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웃으며 기회를 찾게 하는 이 태도는, 우리의 삶이 견디기 힘들 만큼 무겁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무게감은 결국 우리를 초월적인 무언가에 기대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가볍게 스스로를 다독이는 이 말이 실제로는 ‘주문(呪文)’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와 사회가 만들어낸 억압적인 구조 속에서, 럭키비키는 그 틀을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찾아낸(장원영이 만든 단어이지만, 이전에는 ‘오히려 좋아’라는 문장이 유행한 적이 있다.) 작은 마법 같은 단어였다. 이 말은 그저 자신의 상황에 대해 웃어넘기는 농담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중심을 잡고자 하는 심리적 방패이자,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기회를 엿보려는 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다시 말해, 럭키비키는 단지 개인의 언어가 아니라, 이 시대의 생존 방식이 되었다. 사회적 압박과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작은 마법을 걸며, 버티고, 나아가고, 때로는 스스로를 속이며 하루를 견뎠다. 그러던 중에 이 주문은 우리가 갇혀 있는 틀을 비틀었다. 나는 이것이 그 너머를 상상하도록 만드는 열쇠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전시는 바로 이와 같은 질문에서 출발했다. 아니, 출발하려고 했었다. 전시를 구성하는 상위 카테고리 개념인 ‘예술통신사’라는 프로젝트는 매해 가장 중요한 이슈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때문에 찬 공기에 익숙해질 무렵이면 주제를 확정해야 하는 시점이 온다. 럭키비키는 내게 있어 이미 확정적인 키워드였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더 큰 이슈가 있을지 몰라 살펴보던 차에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한강 작가가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작가 개인의 성취를 넘어 한국 문학계, 나아가 한국 사회에 희망이라는 불을 지핀 중대한 사건이었다. 90년대의 스포츠 스타 박찬호, 박세리 선수와 같이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럭키비키와 노벨문학상을 저울질해야 하는 고민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서정적 산문”이라는 한강 작가의 문학을 평가하는 기사를 접하고 난 뒤, 나는 ‘이거 완전 럭키비키잖앙🍀’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한강 작가의 작품 세계가 드러내는 서사는 그 자체로 럭키비키와 닮아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검색해 본 바로는 아마도) 그녀의 문학은 인간의 고통과 연약함 속에서도 삶의 가능성을 포착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역사적 트라우마와 개인적 상처가 교차하는 순간에도, 한강 작가는 언어와 서사를 통해 그 틈새에서 빛을 발견해 내는 작업을 이어왔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는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도 긍정을 탐색하려는 럭키비키의 태도와 묘하게 맞닿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정법으로 작성한 앞의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문제는 내가 한강 작가의 글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이야기했고, 뉴스는 한강의 문학 세계를 찬양했다. 하지만 나는 그 열기에 휩쓸려 읽고 싶지 않았다. 럭키비키는 그렇게 말하고 다니면서 왜 책은 읽기 싫을까? 상을 타기 전에 읽었어야 하는데, 평소에 책을 읽지 않고, 뒤늦게 유행에 편승하려는 것처럼 보일까 봐? 어쨌든 노벨문학상이라는 거대한 타이틀이 만들어낸 집단적 열광 속에서, 한 발짝 물러나 한 번 더 럭키비키의 태도로 생각했다.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읽지 못해서 정확한 서사와 맥락을 알 수 없으니 전시에 활용할 수 없겠어, 하지만 다른 문학 작품들을 차용한다면, 문학 열풍을 가져온 이 시기를 은유하면서도, 더 익숙한 서사로 전시를 구성할 수 있겠는걸? 이거 완전 럭키비키잖앙🍀’이라고 말이다. 문학은 개인의 서사를 넘어, 그 서사가 속한 시대와 사회를 투영하기에 전시 《럭키비키》를 구성하는 섹션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문학작품 속에서 충분히 발견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렇게 나는 기억을 거슬러, 중고등학교 시절에 읽었던 몇 되지 않는 문학 작품들을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양한 책을 떠올렸으나, 기억 속에 명확한 내용으로 자리 잡혀 있는 책이 많지 않다는 점이 탐색에 가장 큰 불편이었고, 게다가 전시의 주제인 럭키비키와의 연결성 등을 고민해야 했기에 꽤나 지난한 일이었다. 어쨌든 또 해내야 했고 해내고야 말았다. 결과적으로 전시의 섹션을 구성하는 작품은 총 다섯 개로, 모두 시대와 개인, 그리고 그 사이에서의 갈등과 가능성을 탐구하는 서사를 담고 있는 작품으로 선택했다. 먼저, 첫 번째 섹션에서의 키워드로 카프카의 『변신』을 제시하였다. 이 작품은 현대 사회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비인간적인 구조와 주체성 상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주인공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하면서 경험하는 소외와 단절은, 오늘날의 청년들이 겪는 사회적 압박과도 닮아 있었다. 이러한 서사는 전시의 첫 섹션 제목인 〈상실의 시대〉와 연결 지었다. 전시의 시작 섹션을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변신』을 엮은 이유는 럭키비키가 주체성을 잃은 개인으로부터 생성된 단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긍정적 태도라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주변 상황을 주체적으로 바꾸려는 노력에서 비롯되는데, 이 럭키비키적 긍정은 역설적으로 나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거나 상실된 상태에서만 발휘될 수 있는 것이 조건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어쩌면 이러한 상실로 말미암아 럭키비키가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사회적 압박과 불확실성 속에서 스스로를 다독이며 억지로라도 긍정을 만들어내야 하는 시대적 풍경이, 이 짧은 단어에 응축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장순_예술통신사-#럭키비키 전시전경
허태민_예술통신사-#럭키비키 전시전경
이어지는 두 번째 섹션, 〈도피로부터 찾은 단서〉에서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차용했다. 주인공 싱클레어가 세상을 이해하고자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자기 내면과 마주하는 이야기는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고 학창 시절 독후감에 썼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그때는 ‘두 세계’라는 개념이 그저 낯설고 멀게 느껴졌지만, 숙제를 해야 했기에 이해한 척 적어내며 억지로 넘겼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와서 다시 떠올려보니, 『데미안』에서 말하는 두 세계란 우리 모두가 서 있는 경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것. 그 경계 위에서 발을 헛디딜까 두려워하면서도 결국은 꿈꾸던 세계로 나아가려는 시도가 우리 삶의 본질적인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도피’라는 단어가 단순히 ‘회피’로만 읽히지 않는 것은 그것이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준비이자, 잠시 멈춰 숨을 고르는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겠다. 럭키비키라는 태도 역시 이런 도피와 닮아있다. 직면한 현실을 외면하거나 모든 문제를 가볍게 넘기려는 것이 아니라, 혼란 속에서도 작지만 중요한 단서를 찾아내려는 몸부림 같은 것이다. 내가 이 말을 반복하며 웃어넘겼던 순간들 역시 내 삶의 고비에서 작은 쉼표처럼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비록 스스로의 문제를 당장 해결하지 못했을지라도, 그 순간은 더 큰 도약을 위해 나를 지탱해 준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박두리_예술통신사-#럭키비키 전시전경
윤보경_예술통신사-#럭키비키 전시전경
이현우_예술통신사-#럭키비키 전시전경
찾아낸 단서로부터 우리는 다른 시각의 판단을 할 수 있다. 이어지는 세 번째 섹션, 〈판단을 위한 해석〉에서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차용했다. 『햄릿』을 처음 읽은 것은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문구를 접했을 때, 어린 나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히 살아야 한다는 결론으로밖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떤 기회에 ‘To be, or not to be’라는 원문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저 죽고 사는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복잡한 상황 속에서 답을 찾으려는 햄릿의 몸부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 원문을 써먹으면서 잘난 척 해보고 싶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이를 쓸 상황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럭키비키스럽게 이제라도 써먹어보자면, 복수의 당위성과 윤리적 갈등 사이에서 햄릿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런데 근엄한 어조로 “죽느냐, 사느냐”를 외친 햄릿과 달리, “럭키비키잖아”를 조잘대며 여기저기 총총댄 나와 비교하면, 무언가 무게감의 차이는 있겠지만, 삶의 고비마다 그 안에 숨어 있는 맥락을 찾아내어 최선의 상태로 판단하려 애쓴다는 것은 두 말이 확실히 연결되는 지점일 것이다.
하지만 애쓴다고 해서 늘 최선을 선택할 수는 없다. 그랬다면 나는 부자가 되었거나 미술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네 번째 섹션, 〈환상이라는 그림자, 현상이라는 빛〉에서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연결 지었다. 삶에 있어서 늘 최선만을 선택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이상을 선택하였을 때면, 이상하게도 현실과 대립하게 된다. 작 중의 돈키호테 또한 이상을 선택하였고, 현실에 대항하였다. 돈키호테의 모험은 이상을 좇는 고귀한 의지와 헛된 환상의 위험 사이를 오갔다. 그러나 끝내 그는 본래의 자신, ‘알론소 키하노(Alonso Quijano, 돈키호테의 본명)’로 돌아간다. 이상을 향한 그의 열망은 멈추지 않았으나, 현실의 무게는 그를 끝내 주저앉혔다. 럭키비키를 외치는 우리의 머릿속에도 무한한 긍정적 에너지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 긍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럭키비키라는 주문이 현실과의 싸움에 지쳐 일종의 ‘정신승리’로 끝나버릴 위험이 있다. 정신승리는 상황의 본질을 외면하고, 긍정이라는 껍데기로 실패나 고통을 포장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다. 돈키호테가 자신의 환상을 현실로 믿으며 풍차와 싸운 것처럼, 우리도 럭키비키라는 주문 아래 현실을 왜곡하거나 스스로를 속일 수는 있겠지만, 우리는 환상과 현상(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야 한다. 그렇기에 럭키비키는 현실을 외면하는 ‘주문’이 아니라, 그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야 한다.
이양헌_예술통신사-#럭키비키 전시전경
김서울_예술통신사-#럭키비키 전시전경
윤윤재_예술통신사-#럭키비키 전시전경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은, 더 나은 가능성을 향한 기다림의 시간과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구는 본래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만들어지고 사용되지만, 목적이 곧바로 결과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대개 도구는 계획, 실험, 조정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효과를 발휘하는데, 성급한 결론보다는 꾸준한 준비와 탐구를 필요로 한다. 특히 럭키비키가 심리적 도구로 기능한다면, 이는 더욱 즉각적인 결과를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의 무게를 견디게 하고, 더 나은 가능성을 모색하며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다림은 비생산적이고 고통스러운 시간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고도를 기다리며』에서와 같이 사건과 사건 사이의 시간이라는 흐름을 넘어, 모종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전시의 마지막 섹션인 〈남겨진 질문〉은 바로 이와 같은 기다림을 이야기한다. 기다림은 답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거나, 그 자체로 질문을 던지는 행위가 된다. 극 중의 주인공들이 끝내 ‘고도(Godot)’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 기다림은 그들 존재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우리가 서 있는 지금의 시대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주체의 회복을 꿈꾸는 것이 럭키비키의 숨겨진 목적이라면, 다가올 긍정적 가능성을 위해 자신을 정비하고 준비하는 도구로써 럭키비키는 기능한다. 기다림은 고통스럽지만, 그것이 만들어내는 시간은 우리를 흔들리지 않게 하는 무게가 된다. 우리가 기다리는 고도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이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이미 나아갈 길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럭키비키를 굉장히 장황하게 풀어냈지만, 사실 내용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고, 무의식적으로 쓰고 있는 그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 결국 럭키비키란 순간의 위기를 웃음으로 넘기고,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붙잡으려는 의지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런데 이 단어 하나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던 기대는, 막상 작품으로 구현할 작가들을 찾아 나서면서부터 산산이 흩어졌다. 당연하게도 럭키비키와 상응하는 내용을 그대로 풀어내는 작가를 찾기란 무척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억지로라도 “럭키비키잖앙🍀”을 외치며 사막에서 바늘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도 뭐, 잃어버린 것을 찾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여정 자체가 럭키비키스러운 거 아니겠는가?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작가들을 만나러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럭키비키스러운 우연한 만남, 때로는 럭키비키스러운 우연한 재회 등으로 작가들을 섭외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만난 임장순의 읽히지 않는 신문은 나에게 사라진 것들이 남긴 잔상인 동시에, 지금 이 시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고, 허태민의 화려함으로 점철된 위장 무늬는 불확실한 시대상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몸짓이자, 보잘것없는 개인의 몸부림으로 다가왔다. 박두리의 번역된 이미지는 익숙한 현실과 낯선 현실 사이를 오르내리는 시소의 흔들림처럼 보이다가, 마지막 균형이 맞춰지기 직전에 찾아오는 미묘한 정적을 떠올리게 했다. 윤보경의 균열은 잃어버린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허상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경계를 그어대는 집요한 집착처럼 느껴졌다. 그 경계는 너와 나를 구분하려는 배척이 아니라, 접근을 위한 선이었다. 이현우의 찰나의 기록은 어떤 결정을 앞두고 일시적으로 멈춰 선 순간의 긴장으로 다가왔고, 이양헌의 부유물은 이상과 현실이 부딪히며 남긴 잔해로 파편화되어 단절될 수 있는 부정적 가능성을 경고했다. 김서울의 구겨진 종이는 썼다 지운 소설의 흔적 위에 새로운 서사를 입히려는 시도로 다가왔고, 윤윤재의 반복된 붓질은 불완전한 세계를 포용하려는 손길이면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로 다가왔다.
이러한 감정과 태도로 다가온 작품들로 전시를 풀어내는 가운데, 가장 고민이 많았던 부분은 각 작업이 가진 고유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서로 다른 서사가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게 하는 것이었다. 임장순의 잔상과 윤윤재의 붓질이 어떻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허태민의 위장 무늬와 박두리의 번역된 이미지가 같은 맥락에서 움직일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머릿속을 떠다니는 동안에도, 작가들의 작업은 그 자체로 답을 품고 있었다. 각자의 고유한 언어로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다루고 있었고, 종내에는 그들이 건네는 메시지는 한 가지로 모였다. 소외와 단절을 그려낸 카프카의 『변신』부터, 삶의 고비에서 질문을 던졌던 햄릿, 환상과 현실 사이를 오가던 돈키호테 등 문학 속 수많은 인물들처럼,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이 보여준 작업에서 현실의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의미의 럭키비키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도피의 시간을 걷고, 판단의 여백을 고민하며, 환상에 부딪혀도 다시금 현상(現狀)을 수습해 보려는 인간의 자세, 그 사이에서 럭키비키라는 키워드는 존재의 균형을 잡아주는 작고 묘한 지탱점이 되었다. 또한 전시의 균형도 잡아주었다.
전시를 오픈하면서, 관람하는 관객들이 작가들의 작품 앞에 서는 그 순간부터 새로운 질문들이 피어오를 것을 기대하였다. ‘나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나를 다독이고 있는가?’, ‘과연 나는 내 문제를 가볍게 웃어넘기는 것에만 안주하고 있지 않은가?’와 같은 물음으로 말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 질문들에 대답, 아니 어쩌면 질문조차 찾지 못하고 그냥 발길을 돌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그 모호함 속에서 오히려 공감과 안도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환언하자면, 럭키비키는 가볍다고만 보기도, 무작정 무거운 태도로 치부하기도 애매한,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면서도 누구에게나 다른 방식으로 다가오는 언어이자 가능성이다. 마치 예술처럼.
나는 그 가능성을 보고 싶어서, 계속해서 럭키비키(예술)를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언젠가 그 외침이 현실에 대한 유쾌한 저항이 될지, 혹은 나 자신을 위한 조용한 위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이 한마디에 담긴 (예술적) 태도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각자만의 비틀린 상황을 조금은 쓸 만하게 바꿔놓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조금은 가져본다. 예술은 언제나 이런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나. 그리고 언젠가, 나 역시 나의 태도를 돌이켜 볼 순간이 온다면, 오늘 이 글을 썼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완전 럭키비키잖앙🍀”
2025.0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anuary.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완전 럭키비키잖앙🍀
박천, 시안미술관 학예실장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봄꽃이 지고 초록이 짙어지는, 봄과 여름의 경계쯤이었던 같다. 어느 날 나는 처음으로 ‘럭키비키’라는 말을 들었다. 어감이 묘하게 입에 착 감겼다. 처음에는 장난스럽게 흘려들었지만, 상대적으로 젊은 지인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어느새 “럭키비키잖아”라고 말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게 젊은 지인들과는 그들과 같은 문화를 향유하는 것처럼, 비슷한 또래의 지인들에게는 젊음과 트렌드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유세를 떨며 전파하듯 떠들고 다녔다. 럭키비키를 외치는 순간, 나를 곤란하게 만든 상황은 물론이고, 작은 실수나 놓친 스케줄에 대해서도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던 어느 날, 이 표현에서 찝찝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 찝찝함은 스스로를 젊어 보이도록 만들겠다는 욕망 때문만은 아니었다. 럭키비키라는 말에 내가 기대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위로처럼 다가왔던 이 말이, 점점 무언의 요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무언의 요구 뒤에는 나를 압박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리해 보면, ‘긍정해도 괜찮아!’와 ‘지금 당장 긍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가 대립된 기호로 공존했던 것이다. 결국 이 말은 나에게 위로로 끝나지 않았고, 나는 이 말을 외칠 때마다 스스로에게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럭키비키는 나에게 긍정을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상하게도 이 말이 입에서 내뱉어질수록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도 스스로 긍정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내 안에서 커지고 있었다. 작은 실수를 변명하는 가벼운 농담 같았던 이 말이, 어느샌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질문이 생겼다. 이 긍정의 언어는 나(우리)를 위로하는 것일까, 아니면 더 큰 압박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럭키비키라는 말은 내게 자책하지 않을 위로를 주었지만, 한편으로 어려움 속에서조차 긍정을 찾아내야 한다는 또 다른 의무를 던졌다. 바꿔서 생각해 보면,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웃으며 기회를 찾게 하는 이 태도는, 우리의 삶이 견디기 힘들 만큼 무겁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무게감은 결국 우리를 초월적인 무언가에 기대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가볍게 스스로를 다독이는 이 말이 실제로는 ‘주문(呪文)’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와 사회가 만들어낸 억압적인 구조 속에서, 럭키비키는 그 틀을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찾아낸(장원영이 만든 단어이지만, 이전에는 ‘오히려 좋아’라는 문장이 유행한 적이 있다.) 작은 마법 같은 단어였다. 이 말은 그저 자신의 상황에 대해 웃어넘기는 농담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중심을 잡고자 하는 심리적 방패이자,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기회를 엿보려는 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다시 말해, 럭키비키는 단지 개인의 언어가 아니라, 이 시대의 생존 방식이 되었다. 사회적 압박과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작은 마법을 걸며, 버티고, 나아가고, 때로는 스스로를 속이며 하루를 견뎠다. 그러던 중에 이 주문은 우리가 갇혀 있는 틀을 비틀었다. 나는 이것이 그 너머를 상상하도록 만드는 열쇠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전시는 바로 이와 같은 질문에서 출발했다. 아니, 출발하려고 했었다. 전시를 구성하는 상위 카테고리 개념인 ‘예술통신사’라는 프로젝트는 매해 가장 중요한 이슈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때문에 찬 공기에 익숙해질 무렵이면 주제를 확정해야 하는 시점이 온다. 럭키비키는 내게 있어 이미 확정적인 키워드였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더 큰 이슈가 있을지 몰라 살펴보던 차에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한강 작가가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작가 개인의 성취를 넘어 한국 문학계, 나아가 한국 사회에 희망이라는 불을 지핀 중대한 사건이었다. 90년대의 스포츠 스타 박찬호, 박세리 선수와 같이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럭키비키와 노벨문학상을 저울질해야 하는 고민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서정적 산문”이라는 한강 작가의 문학을 평가하는 기사를 접하고 난 뒤, 나는 ‘이거 완전 럭키비키잖앙🍀’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한강 작가의 작품 세계가 드러내는 서사는 그 자체로 럭키비키와 닮아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검색해 본 바로는 아마도) 그녀의 문학은 인간의 고통과 연약함 속에서도 삶의 가능성을 포착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역사적 트라우마와 개인적 상처가 교차하는 순간에도, 한강 작가는 언어와 서사를 통해 그 틈새에서 빛을 발견해 내는 작업을 이어왔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는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도 긍정을 탐색하려는 럭키비키의 태도와 묘하게 맞닿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정법으로 작성한 앞의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문제는 내가 한강 작가의 글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이야기했고, 뉴스는 한강의 문학 세계를 찬양했다. 하지만 나는 그 열기에 휩쓸려 읽고 싶지 않았다. 럭키비키는 그렇게 말하고 다니면서 왜 책은 읽기 싫을까? 상을 타기 전에 읽었어야 하는데, 평소에 책을 읽지 않고, 뒤늦게 유행에 편승하려는 것처럼 보일까 봐? 어쨌든 노벨문학상이라는 거대한 타이틀이 만들어낸 집단적 열광 속에서, 한 발짝 물러나 한 번 더 럭키비키의 태도로 생각했다.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읽지 못해서 정확한 서사와 맥락을 알 수 없으니 전시에 활용할 수 없겠어, 하지만 다른 문학 작품들을 차용한다면, 문학 열풍을 가져온 이 시기를 은유하면서도, 더 익숙한 서사로 전시를 구성할 수 있겠는걸? 이거 완전 럭키비키잖앙🍀’이라고 말이다. 문학은 개인의 서사를 넘어, 그 서사가 속한 시대와 사회를 투영하기에 전시 《럭키비키》를 구성하는 섹션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문학작품 속에서 충분히 발견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렇게 나는 기억을 거슬러, 중고등학교 시절에 읽었던 몇 되지 않는 문학 작품들을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양한 책을 떠올렸으나, 기억 속에 명확한 내용으로 자리 잡혀 있는 책이 많지 않다는 점이 탐색에 가장 큰 불편이었고, 게다가 전시의 주제인 럭키비키와의 연결성 등을 고민해야 했기에 꽤나 지난한 일이었다. 어쨌든 또 해내야 했고 해내고야 말았다. 결과적으로 전시의 섹션을 구성하는 작품은 총 다섯 개로, 모두 시대와 개인, 그리고 그 사이에서의 갈등과 가능성을 탐구하는 서사를 담고 있는 작품으로 선택했다. 먼저, 첫 번째 섹션에서의 키워드로 카프카의 『변신』을 제시하였다. 이 작품은 현대 사회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비인간적인 구조와 주체성 상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주인공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하면서 경험하는 소외와 단절은, 오늘날의 청년들이 겪는 사회적 압박과도 닮아 있었다. 이러한 서사는 전시의 첫 섹션 제목인 〈상실의 시대〉와 연결 지었다. 전시의 시작 섹션을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변신』을 엮은 이유는 럭키비키가 주체성을 잃은 개인으로부터 생성된 단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긍정적 태도라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주변 상황을 주체적으로 바꾸려는 노력에서 비롯되는데, 이 럭키비키적 긍정은 역설적으로 나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거나 상실된 상태에서만 발휘될 수 있는 것이 조건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어쩌면 이러한 상실로 말미암아 럭키비키가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사회적 압박과 불확실성 속에서 스스로를 다독이며 억지로라도 긍정을 만들어내야 하는 시대적 풍경이, 이 짧은 단어에 응축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장순_예술통신사-#럭키비키 전시전경
허태민_예술통신사-#럭키비키 전시전경
이어지는 두 번째 섹션, 〈도피로부터 찾은 단서〉에서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차용했다. 주인공 싱클레어가 세상을 이해하고자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자기 내면과 마주하는 이야기는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고 학창 시절 독후감에 썼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그때는 ‘두 세계’라는 개념이 그저 낯설고 멀게 느껴졌지만, 숙제를 해야 했기에 이해한 척 적어내며 억지로 넘겼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와서 다시 떠올려보니, 『데미안』에서 말하는 두 세계란 우리 모두가 서 있는 경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것. 그 경계 위에서 발을 헛디딜까 두려워하면서도 결국은 꿈꾸던 세계로 나아가려는 시도가 우리 삶의 본질적인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도피’라는 단어가 단순히 ‘회피’로만 읽히지 않는 것은 그것이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준비이자, 잠시 멈춰 숨을 고르는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겠다. 럭키비키라는 태도 역시 이런 도피와 닮아있다. 직면한 현실을 외면하거나 모든 문제를 가볍게 넘기려는 것이 아니라, 혼란 속에서도 작지만 중요한 단서를 찾아내려는 몸부림 같은 것이다. 내가 이 말을 반복하며 웃어넘겼던 순간들 역시 내 삶의 고비에서 작은 쉼표처럼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비록 스스로의 문제를 당장 해결하지 못했을지라도, 그 순간은 더 큰 도약을 위해 나를 지탱해 준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박두리_예술통신사-#럭키비키 전시전경
윤보경_예술통신사-#럭키비키 전시전경
이현우_예술통신사-#럭키비키 전시전경
찾아낸 단서로부터 우리는 다른 시각의 판단을 할 수 있다. 이어지는 세 번째 섹션, 〈판단을 위한 해석〉에서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차용했다. 『햄릿』을 처음 읽은 것은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문구를 접했을 때, 어린 나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히 살아야 한다는 결론으로밖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떤 기회에 ‘To be, or not to be’라는 원문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저 죽고 사는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복잡한 상황 속에서 답을 찾으려는 햄릿의 몸부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 원문을 써먹으면서 잘난 척 해보고 싶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이를 쓸 상황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럭키비키스럽게 이제라도 써먹어보자면, 복수의 당위성과 윤리적 갈등 사이에서 햄릿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런데 근엄한 어조로 “죽느냐, 사느냐”를 외친 햄릿과 달리, “럭키비키잖아”를 조잘대며 여기저기 총총댄 나와 비교하면, 무언가 무게감의 차이는 있겠지만, 삶의 고비마다 그 안에 숨어 있는 맥락을 찾아내어 최선의 상태로 판단하려 애쓴다는 것은 두 말이 확실히 연결되는 지점일 것이다.
하지만 애쓴다고 해서 늘 최선을 선택할 수는 없다. 그랬다면 나는 부자가 되었거나 미술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네 번째 섹션, 〈환상이라는 그림자, 현상이라는 빛〉에서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연결 지었다. 삶에 있어서 늘 최선만을 선택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이상을 선택하였을 때면, 이상하게도 현실과 대립하게 된다. 작 중의 돈키호테 또한 이상을 선택하였고, 현실에 대항하였다. 돈키호테의 모험은 이상을 좇는 고귀한 의지와 헛된 환상의 위험 사이를 오갔다. 그러나 끝내 그는 본래의 자신, ‘알론소 키하노(Alonso Quijano, 돈키호테의 본명)’로 돌아간다. 이상을 향한 그의 열망은 멈추지 않았으나, 현실의 무게는 그를 끝내 주저앉혔다. 럭키비키를 외치는 우리의 머릿속에도 무한한 긍정적 에너지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 긍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럭키비키라는 주문이 현실과의 싸움에 지쳐 일종의 ‘정신승리’로 끝나버릴 위험이 있다. 정신승리는 상황의 본질을 외면하고, 긍정이라는 껍데기로 실패나 고통을 포장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다. 돈키호테가 자신의 환상을 현실로 믿으며 풍차와 싸운 것처럼, 우리도 럭키비키라는 주문 아래 현실을 왜곡하거나 스스로를 속일 수는 있겠지만, 우리는 환상과 현상(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야 한다. 그렇기에 럭키비키는 현실을 외면하는 ‘주문’이 아니라, 그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야 한다.
이양헌_예술통신사-#럭키비키 전시전경
김서울_예술통신사-#럭키비키 전시전경
윤윤재_예술통신사-#럭키비키 전시전경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은, 더 나은 가능성을 향한 기다림의 시간과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구는 본래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만들어지고 사용되지만, 목적이 곧바로 결과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대개 도구는 계획, 실험, 조정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효과를 발휘하는데, 성급한 결론보다는 꾸준한 준비와 탐구를 필요로 한다. 특히 럭키비키가 심리적 도구로 기능한다면, 이는 더욱 즉각적인 결과를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의 무게를 견디게 하고, 더 나은 가능성을 모색하며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다림은 비생산적이고 고통스러운 시간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고도를 기다리며』에서와 같이 사건과 사건 사이의 시간이라는 흐름을 넘어, 모종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전시의 마지막 섹션인 〈남겨진 질문〉은 바로 이와 같은 기다림을 이야기한다. 기다림은 답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거나, 그 자체로 질문을 던지는 행위가 된다. 극 중의 주인공들이 끝내 ‘고도(Godot)’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 기다림은 그들 존재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우리가 서 있는 지금의 시대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주체의 회복을 꿈꾸는 것이 럭키비키의 숨겨진 목적이라면, 다가올 긍정적 가능성을 위해 자신을 정비하고 준비하는 도구로써 럭키비키는 기능한다. 기다림은 고통스럽지만, 그것이 만들어내는 시간은 우리를 흔들리지 않게 하는 무게가 된다. 우리가 기다리는 고도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이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이미 나아갈 길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럭키비키를 굉장히 장황하게 풀어냈지만, 사실 내용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고, 무의식적으로 쓰고 있는 그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 결국 럭키비키란 순간의 위기를 웃음으로 넘기고,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붙잡으려는 의지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런데 이 단어 하나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던 기대는, 막상 작품으로 구현할 작가들을 찾아 나서면서부터 산산이 흩어졌다. 당연하게도 럭키비키와 상응하는 내용을 그대로 풀어내는 작가를 찾기란 무척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억지로라도 “럭키비키잖앙🍀”을 외치며 사막에서 바늘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도 뭐, 잃어버린 것을 찾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여정 자체가 럭키비키스러운 거 아니겠는가?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작가들을 만나러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럭키비키스러운 우연한 만남, 때로는 럭키비키스러운 우연한 재회 등으로 작가들을 섭외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만난 임장순의 읽히지 않는 신문은 나에게 사라진 것들이 남긴 잔상인 동시에, 지금 이 시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고, 허태민의 화려함으로 점철된 위장 무늬는 불확실한 시대상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몸짓이자, 보잘것없는 개인의 몸부림으로 다가왔다. 박두리의 번역된 이미지는 익숙한 현실과 낯선 현실 사이를 오르내리는 시소의 흔들림처럼 보이다가, 마지막 균형이 맞춰지기 직전에 찾아오는 미묘한 정적을 떠올리게 했다. 윤보경의 균열은 잃어버린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허상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경계를 그어대는 집요한 집착처럼 느껴졌다. 그 경계는 너와 나를 구분하려는 배척이 아니라, 접근을 위한 선이었다. 이현우의 찰나의 기록은 어떤 결정을 앞두고 일시적으로 멈춰 선 순간의 긴장으로 다가왔고, 이양헌의 부유물은 이상과 현실이 부딪히며 남긴 잔해로 파편화되어 단절될 수 있는 부정적 가능성을 경고했다. 김서울의 구겨진 종이는 썼다 지운 소설의 흔적 위에 새로운 서사를 입히려는 시도로 다가왔고, 윤윤재의 반복된 붓질은 불완전한 세계를 포용하려는 손길이면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로 다가왔다.
이러한 감정과 태도로 다가온 작품들로 전시를 풀어내는 가운데, 가장 고민이 많았던 부분은 각 작업이 가진 고유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서로 다른 서사가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게 하는 것이었다. 임장순의 잔상과 윤윤재의 붓질이 어떻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허태민의 위장 무늬와 박두리의 번역된 이미지가 같은 맥락에서 움직일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머릿속을 떠다니는 동안에도, 작가들의 작업은 그 자체로 답을 품고 있었다. 각자의 고유한 언어로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다루고 있었고, 종내에는 그들이 건네는 메시지는 한 가지로 모였다. 소외와 단절을 그려낸 카프카의 『변신』부터, 삶의 고비에서 질문을 던졌던 햄릿, 환상과 현실 사이를 오가던 돈키호테 등 문학 속 수많은 인물들처럼,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이 보여준 작업에서 현실의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의미의 럭키비키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도피의 시간을 걷고, 판단의 여백을 고민하며, 환상에 부딪혀도 다시금 현상(現狀)을 수습해 보려는 인간의 자세, 그 사이에서 럭키비키라는 키워드는 존재의 균형을 잡아주는 작고 묘한 지탱점이 되었다. 또한 전시의 균형도 잡아주었다.
전시를 오픈하면서, 관람하는 관객들이 작가들의 작품 앞에 서는 그 순간부터 새로운 질문들이 피어오를 것을 기대하였다. ‘나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나를 다독이고 있는가?’, ‘과연 나는 내 문제를 가볍게 웃어넘기는 것에만 안주하고 있지 않은가?’와 같은 물음으로 말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 질문들에 대답, 아니 어쩌면 질문조차 찾지 못하고 그냥 발길을 돌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그 모호함 속에서 오히려 공감과 안도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환언하자면, 럭키비키는 가볍다고만 보기도, 무작정 무거운 태도로 치부하기도 애매한,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면서도 누구에게나 다른 방식으로 다가오는 언어이자 가능성이다. 마치 예술처럼.
나는 그 가능성을 보고 싶어서, 계속해서 럭키비키(예술)를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언젠가 그 외침이 현실에 대한 유쾌한 저항이 될지, 혹은 나 자신을 위한 조용한 위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이 한마디에 담긴 (예술적) 태도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각자만의 비틀린 상황을 조금은 쓸 만하게 바꿔놓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조금은 가져본다. 예술은 언제나 이런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나. 그리고 언젠가, 나 역시 나의 태도를 돌이켜 볼 순간이 온다면, 오늘 이 글을 썼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완전 럭키비키잖앙🍀”
2025.0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anuary.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