얽힌 시간, 스민 흔적
박천, 시안미술관 학예실장
느린 환절기_전시전경
1. 흔적, 시간
우리는 시간을 어제로부터 오늘, 그리고 내일로 이어지는 선형적인 흐름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서양철학이 오늘날의 사고 체계에서 보편이라는 지위를 차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동아시아의 전통적 사유 속에서 시간은 다르게 체험된다. 일출과 일몰, 계절의 순환처럼 반복되는 자연의 리듬 속에서 시간은 단지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고, 쌓이며, 때로는 엮여가는 존재로 경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시간은 직선적인 흐름으로 고정되지 않고, 모든 순간이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와 얽혀있는 복합적인 그물망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자연의 순환 속에서도 생명이 기억을 안고 이어지는 방식에 기초하여, 자연과 인간이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내었던 자리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이정민은 바로 이러한 다층적 시간의 경험을 작업의 상징체로써 담아낸다. 자연과 인간, 물질과 환경이 만들어내는 표식을 관계의 새로운 층위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간이 과거를 반추하거나 미래를 예견한다기보다는, 현재라는 순간 안에서 엮이고 변화하며,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가는 동적 과정으로 드러내는 것에 있다. 물론 과거와 미래 사이의 관계성과 연속성 또한 포함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작업에 담긴 이미지들은 단순히 지나간 시간의 자취로 머무르지 않는다. 자연에서 얻어진 물질과 환경적 요소, 그리고 작가의 개입이 더해지면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관계의 층위를 서술한다. 들풀이나 유기물질과 같은 재료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고, 이 과정에서 남겨진 경험과 기억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물질 간의 상호작용을 담아낸다. 때문에 작업의 이미지는 단일한 기억이나 기록을 넘어, 관계와 변형의 결과물로서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흔적과 같은 요소들은 시간의 물리적 증거이자, 자연과 인간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서 생성되는 이야기의 근거이다.
자연이 스스로 그러하듯, 이정민의 작업은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며, 교차하고 변형되어 예측불가한 형태로 스스로를 구성하는 방식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한다. 그리고 자신의 작업 또한 확신할 수 없는 목적지로 향해 가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러운 정의를 구축할 수 있는가라는 가능성을 질문한다.
2. 얽힘, 변화
‘자연’이라는 단어는 흔히 단일한 개념처럼 받아들여지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며 얽히고설켜 있는 복합체에 가깝다. 자연은 각각의 개별적 존재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연의 속성을 작업의 근간으로 삼은 작가는 시간과 환경, 그리고 물질의 ‘얽힘’이 능동적으로 관계를 형성하며 변형되는 실체임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단, 이 지점에서 얽힘은 존재 자체가 복잡한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풀어내자면, 주체이자 창작 행위자인 작가와 관찰 대상(시간, 사회, 환경, 물질, 인간 등)의 분리 불가능성, 그리고 물질과 비물질,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물며 모든 관계를 상호 구성적으로 보는 것이다.
느린 환절기_sunprinting, natural dyeing, oriental ink, botanic emulsion on paper_2022
작품 〈느린 환절기〉에서의 제작 에피소드는 이정민의 작업이 (우연성을 포함한) 자연과 환경적 요소를 어떻게 수용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노광 작업 도중 예상치 못한 비로 인해 지표면의 습도가 급격히 상승했고, 이로 인해 종이 표면은 마르고 다시 습기를 머금는 과정을 반복하며 작업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환경적 개입은 작가가 계획한 것보다 이미지 간의 경계를 더욱 흐리게 만들었고, 온도와 습도의 차이로 인해 일부 부분은 뿌옇게 변질되었다. 작가는 이 과정을 돌아보며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내가 완성했다기보다, 자연이 완성해 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라고 말한다. 이는 시간과 환경이 부차적인 배경으로 머무르지 않고, 창작 과정의 주체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느린 환절기〉에서의 제작 에피소드는 리좀적 연결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시각적으로 풀어낸다. 이정민의 작업에서 자연적 요인과 작가의 의도는 중심과 종속의 관계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 요소는 리좀적 연결망 속에서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가는 창발적 과정의 일부로 기능한다. 환경적 개입은 작품에 영향을 미치는 과실이나 오류와 같은 부차적인 변수로 간주되지 않고, 작품 자체의 본질을 형성하는 주요 요소로 작용한다. 작가는 이를 통제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우연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창작의 중요한 일부로 삼는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작용의 과정을 통해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며, 시간과 환경이 만들어낸 잠재적 맥락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그렇기에 이정민의 작업은 자연을 재현 혹은 현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의 능동성과 우연성을 통해 관계와 변형의 ‘과정’을 이야기하며, 이를 새로운 서사로 확장한다.
3. 과정, 관계
어쩌면 이와 같은 맥락을 포함하는 작업에서 ‘과정’은 화이트헤드가 말한 것처럼 모든 존재를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상호작용하며 형성되는 과정으로 보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철학적 틀은 작업 안에 녹아있는 시간과 흔적의 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사소한 이동1_sunprinting, natural dyeing, botanic emulsion on paper_2022
사소한 이동2_sunprinting, natural dyeing, botanic emulsion on paper_2022
이정민은 지금의 작업에 이르기까지 (제작 방식에서) 수많은 실험과 실패를 반복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늘 영향을 끼치는 다양한 변수와 상황, 조건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에 맞추어 고민하고 방황하며 방법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함께 결합되어 진행되었다”라고 한다. 그렇기에 이정민의 작업은 항상 최종적인 결과물의 도출을 목적으로 한다기보다는, 여전히 발전 중인 과정의 한 단면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즉, 이러한 지속적인 실험은 단일하거나 계획된 도착지를 설정하지 않고,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도를 이어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개인전 《자리바꿈》에서 확인했던 작품들과 이 전시의 기획의도는 시간과 흔적의 관계뿐만 아니라, 이러한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도심 속 방치된 공간에서 들풀은 인간이 변형시킨 상태의 환경적 요인을 극복하고 스스로 자생한다. 그리고 방치된 시간의 흐름과 상호작용하며, 그 모습이 어떠하든 간에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이는 도심이 구축되기 이전에 스스로 자연이었기 때문이겠다. 이렇게 대상과 대상이 관계하며 축적되어 쌓이는 기억들 역시 ‘과정’ 속에서 구축과 변형을 지속한다.
한편, 작업 과정에서의 실험적 시도는 이러한 관계의 본질을 강화한다. 자연염색과 고전 프린트 기법은 시간과 환경적 요소가 작품 형성에 기여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방증이자 작가적 태도이다. 주지하듯이 두 방식 모두 햇빛, 온도, 습도와 같은 외부 환경의 영향을 토대로 결과를 만들어낸다. 여기에서 작가는 환경적 개입을 통제하려 하기보다 수용하며, 이를 작업의 일부로 포함시킨다. 변수를 극도로 제한하고 통제하는 방식이 오늘날의 프린트나 염색 방식이라면, 이정민의 작업은 자연과의 상호 협력을 통해 만들어내는 고전적 방식을 따른다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그 자체로 흔적이며 과정이 된다. 전통의 기억을 오늘과 이웃시키는 작업은 과거를 반영하는 수동적인 기록으로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관계와 의미를 만들어가는 능동적 기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작업이 제작되는 과정과 작가가 작업을 대하는 태도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새롭게 형성되는 존재로서 일련의 예술적 가능성을 지닌다.
4. 얽힘, 과정, 흔적
이정민이 탐색하는 가능성은 시간, 얽힘, 과정이라는 개념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관계의 형성과 변형, 그리고 그것이 남기는 흔적을 토대로 구성된다. 이러한 작업은 중심 없이 확장되고 서로 얽히고설키는 관계망 속에서 존재와 변화가 어떻게 생성되는지를 시각화한다. 또한 존재를 고착된 것으로 보지 않고 상호작용과 변화를 통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작가의 태도는 예측 불가능하지만 무한히 확장되는 지점에 작업을 위치시킨다.
스물네 개의 해_natural dyeing on paper_13x11cm, eachx240_wood frame_172x28cm, eachx12_2023
〈스물네 개의 해〉는 이러한 지점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제목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듯이 ‘스물네 개의 해’는 일 년을 스물네 개의 절기로 나누는 전통적인 시간 체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작가는 이 스물네 개의 절기를 차용하면서도, 절기의 문화적 맥락을 직접적으로 끌고 오기보다는, 이를 상징적인 구조로 재구성하여 시간과 관계가 연결되고 변형되는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을 계절의 변화로 구분하는 이 절기 체계는 자연과 인간의 활동이 조화를 이루는 상호작용의 상징으로 작동한다. 이정민은 이러한 전통적 개념을 철학적 사유로 확장하여 시간과 환경, 인간과 자연이 만들어내는 얽힘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예를 들어, 동일한 작업이 한겨울의 절기인 대설(大雪)과 한여름의 절기인 대서(大暑)에 이루어졌을 때, 빛과 열, 습도의 차이가 결과물에 완전히 다른 질감을 부여한다. 대설의 차가운 공기와 흐린 빛 아래서는 뚜렷한 대비와 명확한 경계가 드러나는 흔적이 남는 반면, 대서의 뜨거운 햇빛과 습한 대기는 번짐과 부드러운 과정을 강조한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자연적 우연성으로 치부하거나 해석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시간과 환경이 작가의 작업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요소로 기능한다.
해그림자 서서하니_전시전경
해그림자 서서하니_전시전경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자연적 우연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환경적 조건을 작업의 일부로 통합하면서도, 작가가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 작업의 전개와 작동을 가능하게 하는 주요한 동력이라는 점이다. 이는 우연성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전적으로 우연에 맡기는 태도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드러낸다. 햇빛, 습도, 온도와 같은 자연적 조건은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작가의 계획과 의도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획득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정민의 작업은 비인간적 조건과 인간적 개입이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한편, 동일한 관계망 속에서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한다. 흔히 자연적 우연성을 중심에 두는 논의와 달리, 작가는 작업에서 비인간적 요소를 조건 없이 수용하지 않고, 자신의 의도 속에서 조율하며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다. 이는 들뢰즈의 리좀과 닮아 있으면서도, 중심 없는 연결 대신, 인간적 의도가 강하게 작동하는 차별성을 지닌다. 또한 시간과 환경, 작가적 개입이 긴밀히 이어지는 이 과정은 흔적이 곧 결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와 과정이 동적으로 작동하며 생성된 것임을 방증한다. 이는 변화와 재구성을 통해 관계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실천적 작업으로 확장시킨다. 이정민의 작업은 동시대 미술이 철학적 사유를 시각적 언어로 풀어내는 실천적 사례로, 인간과 자연, 시간과 환경이 교차하며 형성된 관계를 통해 또 하나의 시선을 제안한다.
2025.02.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February.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얽힌 시간, 스민 흔적
박천, 시안미술관 학예실장
느린 환절기_전시전경
1. 흔적, 시간
우리는 시간을 어제로부터 오늘, 그리고 내일로 이어지는 선형적인 흐름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서양철학이 오늘날의 사고 체계에서 보편이라는 지위를 차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동아시아의 전통적 사유 속에서 시간은 다르게 체험된다. 일출과 일몰, 계절의 순환처럼 반복되는 자연의 리듬 속에서 시간은 단지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고, 쌓이며, 때로는 엮여가는 존재로 경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시간은 직선적인 흐름으로 고정되지 않고, 모든 순간이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와 얽혀있는 복합적인 그물망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자연의 순환 속에서도 생명이 기억을 안고 이어지는 방식에 기초하여, 자연과 인간이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내었던 자리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이정민은 바로 이러한 다층적 시간의 경험을 작업의 상징체로써 담아낸다. 자연과 인간, 물질과 환경이 만들어내는 표식을 관계의 새로운 층위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간이 과거를 반추하거나 미래를 예견한다기보다는, 현재라는 순간 안에서 엮이고 변화하며,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가는 동적 과정으로 드러내는 것에 있다. 물론 과거와 미래 사이의 관계성과 연속성 또한 포함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작업에 담긴 이미지들은 단순히 지나간 시간의 자취로 머무르지 않는다. 자연에서 얻어진 물질과 환경적 요소, 그리고 작가의 개입이 더해지면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관계의 층위를 서술한다. 들풀이나 유기물질과 같은 재료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고, 이 과정에서 남겨진 경험과 기억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물질 간의 상호작용을 담아낸다. 때문에 작업의 이미지는 단일한 기억이나 기록을 넘어, 관계와 변형의 결과물로서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흔적과 같은 요소들은 시간의 물리적 증거이자, 자연과 인간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서 생성되는 이야기의 근거이다.
자연이 스스로 그러하듯, 이정민의 작업은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며, 교차하고 변형되어 예측불가한 형태로 스스로를 구성하는 방식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한다. 그리고 자신의 작업 또한 확신할 수 없는 목적지로 향해 가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러운 정의를 구축할 수 있는가라는 가능성을 질문한다.
2. 얽힘, 변화
‘자연’이라는 단어는 흔히 단일한 개념처럼 받아들여지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며 얽히고설켜 있는 복합체에 가깝다. 자연은 각각의 개별적 존재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연의 속성을 작업의 근간으로 삼은 작가는 시간과 환경, 그리고 물질의 ‘얽힘’이 능동적으로 관계를 형성하며 변형되는 실체임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단, 이 지점에서 얽힘은 존재 자체가 복잡한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풀어내자면, 주체이자 창작 행위자인 작가와 관찰 대상(시간, 사회, 환경, 물질, 인간 등)의 분리 불가능성, 그리고 물질과 비물질,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물며 모든 관계를 상호 구성적으로 보는 것이다.
느린 환절기_sunprinting, natural dyeing, oriental ink, botanic emulsion on paper_2022
작품 〈느린 환절기〉에서의 제작 에피소드는 이정민의 작업이 (우연성을 포함한) 자연과 환경적 요소를 어떻게 수용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노광 작업 도중 예상치 못한 비로 인해 지표면의 습도가 급격히 상승했고, 이로 인해 종이 표면은 마르고 다시 습기를 머금는 과정을 반복하며 작업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환경적 개입은 작가가 계획한 것보다 이미지 간의 경계를 더욱 흐리게 만들었고, 온도와 습도의 차이로 인해 일부 부분은 뿌옇게 변질되었다. 작가는 이 과정을 돌아보며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내가 완성했다기보다, 자연이 완성해 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라고 말한다. 이는 시간과 환경이 부차적인 배경으로 머무르지 않고, 창작 과정의 주체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느린 환절기〉에서의 제작 에피소드는 리좀적 연결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시각적으로 풀어낸다. 이정민의 작업에서 자연적 요인과 작가의 의도는 중심과 종속의 관계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 요소는 리좀적 연결망 속에서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가는 창발적 과정의 일부로 기능한다. 환경적 개입은 작품에 영향을 미치는 과실이나 오류와 같은 부차적인 변수로 간주되지 않고, 작품 자체의 본질을 형성하는 주요 요소로 작용한다. 작가는 이를 통제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우연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창작의 중요한 일부로 삼는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작용의 과정을 통해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며, 시간과 환경이 만들어낸 잠재적 맥락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그렇기에 이정민의 작업은 자연을 재현 혹은 현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의 능동성과 우연성을 통해 관계와 변형의 ‘과정’을 이야기하며, 이를 새로운 서사로 확장한다.
3. 과정, 관계
어쩌면 이와 같은 맥락을 포함하는 작업에서 ‘과정’은 화이트헤드가 말한 것처럼 모든 존재를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상호작용하며 형성되는 과정으로 보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철학적 틀은 작업 안에 녹아있는 시간과 흔적의 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사소한 이동1_sunprinting, natural dyeing, botanic emulsion on paper_2022
사소한 이동2_sunprinting, natural dyeing, botanic emulsion on paper_2022
이정민은 지금의 작업에 이르기까지 (제작 방식에서) 수많은 실험과 실패를 반복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늘 영향을 끼치는 다양한 변수와 상황, 조건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에 맞추어 고민하고 방황하며 방법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함께 결합되어 진행되었다”라고 한다. 그렇기에 이정민의 작업은 항상 최종적인 결과물의 도출을 목적으로 한다기보다는, 여전히 발전 중인 과정의 한 단면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즉, 이러한 지속적인 실험은 단일하거나 계획된 도착지를 설정하지 않고,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도를 이어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개인전 《자리바꿈》에서 확인했던 작품들과 이 전시의 기획의도는 시간과 흔적의 관계뿐만 아니라, 이러한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도심 속 방치된 공간에서 들풀은 인간이 변형시킨 상태의 환경적 요인을 극복하고 스스로 자생한다. 그리고 방치된 시간의 흐름과 상호작용하며, 그 모습이 어떠하든 간에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이는 도심이 구축되기 이전에 스스로 자연이었기 때문이겠다. 이렇게 대상과 대상이 관계하며 축적되어 쌓이는 기억들 역시 ‘과정’ 속에서 구축과 변형을 지속한다.
한편, 작업 과정에서의 실험적 시도는 이러한 관계의 본질을 강화한다. 자연염색과 고전 프린트 기법은 시간과 환경적 요소가 작품 형성에 기여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방증이자 작가적 태도이다. 주지하듯이 두 방식 모두 햇빛, 온도, 습도와 같은 외부 환경의 영향을 토대로 결과를 만들어낸다. 여기에서 작가는 환경적 개입을 통제하려 하기보다 수용하며, 이를 작업의 일부로 포함시킨다. 변수를 극도로 제한하고 통제하는 방식이 오늘날의 프린트나 염색 방식이라면, 이정민의 작업은 자연과의 상호 협력을 통해 만들어내는 고전적 방식을 따른다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그 자체로 흔적이며 과정이 된다. 전통의 기억을 오늘과 이웃시키는 작업은 과거를 반영하는 수동적인 기록으로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관계와 의미를 만들어가는 능동적 기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작업이 제작되는 과정과 작가가 작업을 대하는 태도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새롭게 형성되는 존재로서 일련의 예술적 가능성을 지닌다.
4. 얽힘, 과정, 흔적
이정민이 탐색하는 가능성은 시간, 얽힘, 과정이라는 개념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관계의 형성과 변형, 그리고 그것이 남기는 흔적을 토대로 구성된다. 이러한 작업은 중심 없이 확장되고 서로 얽히고설키는 관계망 속에서 존재와 변화가 어떻게 생성되는지를 시각화한다. 또한 존재를 고착된 것으로 보지 않고 상호작용과 변화를 통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작가의 태도는 예측 불가능하지만 무한히 확장되는 지점에 작업을 위치시킨다.
스물네 개의 해_natural dyeing on paper_13x11cm, eachx240_wood frame_172x28cm, eachx12_2023
〈스물네 개의 해〉는 이러한 지점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제목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듯이 ‘스물네 개의 해’는 일 년을 스물네 개의 절기로 나누는 전통적인 시간 체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작가는 이 스물네 개의 절기를 차용하면서도, 절기의 문화적 맥락을 직접적으로 끌고 오기보다는, 이를 상징적인 구조로 재구성하여 시간과 관계가 연결되고 변형되는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을 계절의 변화로 구분하는 이 절기 체계는 자연과 인간의 활동이 조화를 이루는 상호작용의 상징으로 작동한다. 이정민은 이러한 전통적 개념을 철학적 사유로 확장하여 시간과 환경, 인간과 자연이 만들어내는 얽힘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예를 들어, 동일한 작업이 한겨울의 절기인 대설(大雪)과 한여름의 절기인 대서(大暑)에 이루어졌을 때, 빛과 열, 습도의 차이가 결과물에 완전히 다른 질감을 부여한다. 대설의 차가운 공기와 흐린 빛 아래서는 뚜렷한 대비와 명확한 경계가 드러나는 흔적이 남는 반면, 대서의 뜨거운 햇빛과 습한 대기는 번짐과 부드러운 과정을 강조한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자연적 우연성으로 치부하거나 해석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시간과 환경이 작가의 작업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요소로 기능한다.
해그림자 서서하니_전시전경
해그림자 서서하니_전시전경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자연적 우연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환경적 조건을 작업의 일부로 통합하면서도, 작가가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 작업의 전개와 작동을 가능하게 하는 주요한 동력이라는 점이다. 이는 우연성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전적으로 우연에 맡기는 태도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드러낸다. 햇빛, 습도, 온도와 같은 자연적 조건은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작가의 계획과 의도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획득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정민의 작업은 비인간적 조건과 인간적 개입이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한편, 동일한 관계망 속에서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한다. 흔히 자연적 우연성을 중심에 두는 논의와 달리, 작가는 작업에서 비인간적 요소를 조건 없이 수용하지 않고, 자신의 의도 속에서 조율하며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다. 이는 들뢰즈의 리좀과 닮아 있으면서도, 중심 없는 연결 대신, 인간적 의도가 강하게 작동하는 차별성을 지닌다. 또한 시간과 환경, 작가적 개입이 긴밀히 이어지는 이 과정은 흔적이 곧 결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와 과정이 동적으로 작동하며 생성된 것임을 방증한다. 이는 변화와 재구성을 통해 관계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실천적 작업으로 확장시킨다. 이정민의 작업은 동시대 미술이 철학적 사유를 시각적 언어로 풀어내는 실천적 사례로, 인간과 자연, 시간과 환경이 교차하며 형성된 관계를 통해 또 하나의 시선을 제안한다.
2025.02.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February.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