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라운드테이블
-뉴욕에서 여성 예술가로 존재하기: 이하윤, 노혜리, 진오, 전효주-
정재연
2024년 12월 4일 오후 5시, 뉴욕 맨하튼에 있는 뉴욕한국문화원. 뉴욕에서 활동하는 여성 예술가 4인과 함께 대화를 나눈다. 이름은 “오렌지 라운드테이블”. 해외에서 활동하는 아시아 여성 예술가들의 다양한 가능성과 미래를 탐구하고, 동시대 현대미술에 관한 관심을 오롯이 이야기 하기 위한 자리였다. <오렌지 라운드테이블>은 여성 예술가들이 주도하는 변화와 에너지를 상징하는 주황색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주황색은 새로운 시작과 변화를 의미하는 색으로, 대화를 나눈 네 명의 여성 예술가 -이하윤, 노혜리, 진오, 전효주- 와 함께 만들어가는 예술적 변화의 흐름을 나타낸다. 필자가 기록한 “오렌지 라운드테이블” 책은 네 명의 여성 예술가가 다루는 매체와 장르 속에서 갖는 구체적 의미, 기능, 관계성을 탐구한다. 글로 존재한 작가들의 작업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들. 설렌다. 글로 끝날 수 있는 시각 매체를 어떤 유형의 형태로 만들 수 있을까? 열린 대화가 답이다.
대화의 기록
예술가들의 작업실은 늘 나에겐 낯설고 낭만적인 공간이다. 2023년부터 2024년까지 작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하며 생각했다. 미술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동하고 변화하는 것이다. 결국, 만남에서 시작해 대화로 이어지며, 예술은 그렇게 탄생한다. 예술의 가치는 직접 참여하여 발견하는 재미, 열린사고와 행동이 예술을 풍성하게 만든다. 대화와 그들의 작업을 기반으로 주고받는 대화의 실천, 그 자체가 예술의 고유 과정이 되는 여정을 살짝 공개한다.
이하윤(Hayoon Jay Lee)은 쌀 작업을 통해 개인을 둘러싼 외부적 환경과 사회, 낯선 문화 그리고 역사 등에 다양한 가치에 질문을 던진다. 미국을 기반으로 조각, 회화, 설치, 퍼포먼스 등 다양한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쌀은 단순하게 음식의 재료뿐만 아니라 문화, 역사, 사회 경제, 정치, 인종 그 이상의 역할을 하기에 작품에선 강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작가는 음식이 우리를 묶어주는 하나의 연결점이라고 말한다. 음식에 대한 상징성은 단순히 민족 정체성으로 정의될 수 없다. 인종, 지역, 젠더, 계급적 차이에 따라 다양한 상징성과 물질적 경험들이 결합하고 어우러져야 한다. 작가는 말한다.
이하윤, Two Mothers-II, 2016, Performance
“음식은 우리를 묶어주고, 연결해 주며, 서로 사랑하게 하죠. 그리고 만나게 해주며, 그 삶의 일부가 되게 해요.” 작가가 펼치는 퍼포먼스는 늘 함께 쌀이라는 오브제가 존재한다.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이 맞을까.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퍼포먼스와 함께 어우러진 작품들은 쌀을 통해 그녀의 사상과 철학을 담은 한 편의 영화와도 같다. “사람들은 절대 혼자 살 수 없어요. 나 혼자만 잘 먹고 잘살면 뭐 해.” 둥글게 원을 만들고 손을 잡은 사람들 머리 위로 쌀이 흘러내린다. 희로애락을 움켜쥐고 기억한다. 2023년 1월, 뉴욕 첼시의 Hollis Taggart 갤러리에서 있었던 퍼포먼스다. 그녀는 쌀이 담긴 천을 찢는다. 인간은 늘 고뇌한다. 삶에는 아픔이 늘 존재한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때에도 나에 대한 연민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 상대방을 포용한다. 포용이 없다면 그녀에게 작업의 동기는 없다. 그녀 자신도 작품을 제작하면서 새롭게 태어나고, 수많은 시작을 거듭하며 위로와 치유를 받는다. “우리는 지금도 살아가고 있어요. 많은 실수와 실패가 있더라도 다시 새롭게 태어나야 해요. 쌀은 내 자신이고 감사와 감동이에요. 쌀은 당신과 나를 연결해 주는 매직입니다.”
노혜리(HyereeRo)는 신체의 움직임과 언어, 그리고 오브제의 교차와 어긋남을 통해 작가의 개인사와 현대사의 직조를 탐구하는 작품을 제작해 왔으며, 공간 내 오브제와 퍼포먼스로 완성되는 작업을 한다. 노혜리와 내가 그녀의 작업실에서 마주 보고 있었을 때 당신이 나를 향해 있었나, 아니면 내가 당신을 향하고 있었던가? 아주 기본적인 물음도 나에게도 기획 소재가 된다. 노혜리의 퍼포먼스를 본 것은 2024년 5월, 뉴욕 차이나타운에 있는 FAR-NEAR 스튜디오에서다. <lunares>라는 제목의 작품은 그녀가 만든 테이블이다. 집에서 사용하는 테이블의 사이즈와 동일하다. 모인 사람들은 테이블 앞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테이블 위에 올라간 아슬아슬한 크고 작은 사물을 만져보고 책의 한 구절씩 읽는다. 작품이 벽에 디스플레이되는 형식이 아닌 사물, 행동 담론, 의미의 영역으로 작품의 범위를 넓혀 나간다. 미술은 이야기할 대상이 필요하고 개념이 필요하다. 미술과 만나는 일은 전시로부터의 탈피다.
노혜리, Haven, 2023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소유할지 고민해요, 저는 살아가는 한 끊임없이 궁금해할 것이고, 탐구하고 작업할 것 같아요. 제가 사물 자체를 대하는 태도는 나의 궁금함에서부터 시작해요.” 라 말한다. 한 공간에서 타인과 함께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 어떤 의견 차이가 있더라도, 조용한 정적만 감돌더라도 모든 시간을 모두 공개함으로써 전시 만들기, 담론 만들기는 이어진다. 목적은 우리가 바라볼 곳을 열어주는가. 아니면 언어를 이끌고 가는가. 그녀가 움직이는 동작 하나 사물 하나가 하나의 언어를 구성한다. 작가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발생하는 모든 것을 탐구하는 것이 어쩌면 그녀가 의도한 부분일지도.
진오(Jean Oh)는 드로잉, 회화, 바느질, 설치 작업 등 회화에 관련된 매체를 스스로 실험하며 그때그때 표현하고 싶은 주제를 다룬다. 천과 바느질에 더 신경을 쓰는 편이지만, 회화와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는지 고민한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2019년, 작고 가녀린 몸에 맑고 다정한 얼굴. 작품을 보고 난 후엔 너무나 다른 느낌의 처절함이었다. 전통회화 작가로서 캔버스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실험을 한다. 가령 미색의 색감을 수백 번 문질러 캔버스 표면을 반복적으로 메운다. 진오를 둘러싸고 있는 곤란함과 긴장감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또한 그녀의 신체에서 손이나 발이 배경 속에 묻힌다. 다양한 캔버스 공간에 시선을 분산시켜 자신을 드러내는 작업을 한다. 가령 계속 보고 있으면 나타나는 눈, 코, 입의 형상이다. 옅은 연필선과 색감, 바느질 흔적 그리고 계속 쌓인 물감은 캔버스 천 안에 스며들어 색이 바랜 느낌마저 든다. 그래서 나는 색이 침투되었다고 표현했다.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스스로 깊은 사람이 되었나? 더 쉽게 내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 아니면 나를 스스로 더 포장해야 하는가? 사실 대학원 졸업 이후에 내 자신을 찾는 데 좀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아요.” 그래서 그녀는 회화에 있어 과감하게 시도하는 것을 감행한다. 나무 지지대 위에 놓여야 할 날것의 캔버스 천을 떼다 물감을 붓고, 헝겊으로 닦아낸 후 말린다. 또 그 위에 또 다시 물감을 붓고, 칠하고, 문지르고, 말리고 기다린다. 그녀가 조절할 수 있는 농도, 질감, 색감을 자유자재로 표현한다. 새로움을 발견할 때 가장 아이처럼 순수한 즐거움을 찾는다고 말한다. 그녀의 말이 아주 뇌리에 깊이 박힌다.
진오, Sniff, 2023, Acrylic and graphite on sewn canvas, 44” x 40”
“제가 계속 작업하면서 성숙해지고, 더 나아진 사람이 되었다 한들 저는 저만의 씻을 수 없는 그 찌질함이 너무 좋거든요.” 이토록 완벽하면서 또한 미성숙하고 조심스러운 그녀의 작업에서 회화 작업의 정의를 내리는 일은 불필요한 일 같다.
전효주(HyojuCheon)는 다학제적 예술가로, 다중매체적 작업을 통해 특정 장소의 조건에 대응하는 공간, 물건 또는 움직이는 몸을 형상화한다. 몸이 공간을 통과하면서 하나의 궤적을 그리고 남긴 물질적 흔적을 기록하는 작업을 한다. 그 기록은 때론 드로잉과 조각으로 혹은, 퍼포먼스로 표현된다. 사실 하나의 작은 조각 혹은 오브제를 만들기 위해 물질과 관계 맺는 방식을 주된 변수로 만드는 게 관건이다. 하지만 어떤 형태를 제작하기 위해서 재료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그 재료의 속성을 따라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전효주에겐 어떤 형태나 흔적을 어떻게 만들어 내는지가 아주 중요했다. 최근엔 신체 움직임과 놀이를 함께 어우를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학부 시절로 돌아가자면, 그녀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을 줄곧 해왔다고 한다. 물론 감정과 공감이 있을 것이고, 소통, 자아 성찰, 선택과 책임, 타인과 함께하는 공동체 의식 등이 있다. 우리의 삶에 시작과 결말이 있을까? 그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녀가 내린 나름의 결론은 ‘무의미한 행동’이다. 우리말로 달리 해석해 보자면 ‘삽질한다’ 가 맞는 표현이겠다. 결국 삽질도 인간만이 할 수 있다.
전효주, 모래성 쌓기: sandcastle building, 2024, basswood, plaster, concrete, sand, dimension variable
반복적이고, 자유롭게 이끌린 움직임, 손끝에서 전해지는 작은 진동과 느낌 조차도 늘 우리는 감각한다. 그녀는 이런 ‘감각에 대한 그리움’으로 작업 아이디어를 구상하기도 한다. 흙과 모래, 그리고 나뭇조각, 소리 같은 것이다. 자연의 파편을 쌓고 또 그걸 무너뜨리는 놀이는 누구라도 쉽사리 할 수 있는 일들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작업의 형성 과정을 놀기도 하고 작업도 같이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체에 대한 발견, 사용 방식을 찾기 위한 시도, 그 물체에 대한 변화 관찰 이 모든 것이 작업이 된다. 금속판을 잘라 두드린 후 철사를 이은 악기 작업, 나무 모서리로 소리를 내는 나무 조각들, 진동으로 미세한 떨림이 만들어 내는 리듬을 선사하는 전동추. 손으로 가지고 놀면서 조작의 재미를 배우고, 조작의 재미는 하나의 대상과 형태의 행동 양식으로 확대된다. 놀이의 존재, 놀이가 어떻게 우리 삶과 연결 되어있는가? 삶 자체 경험이 놀이다. 예술 바깥에서도 언제든 이용할 수 있다.
무엇이든 외면하지 않기로 한다.
<오렌지 라운드테이블>을 기획하기 시작하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다면 앞으로 나가거나, 넓어져야 할 텐데. 물음에서 시작하면 답이 꼭 필요할까. 예술에 근거가 있다면, 근거를 따라 물길을 만들어야 할 텐데. 걱정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여성 예술가들의 작업에 더 눈이 갔던 건 사실이다. 왜 유독 여성 예술가 작업에 몰두하게 되었을까? “어떻게 이 치열한 뉴욕에서 작업하세요.? “여러 예술가 사이에서 어떻게 전시하고, 자신을 증명하세요?” 내가 내뱉으면서도 냉혹한 현실에서 응원의 말이자 물음처럼 느껴진다. 근데 내 자신도 마찬가지다. 되돌아보면 나에게도 적용되는 말들.
“아이 키우면서 어떻게 글을 쓰세요.?” “아이 키우면서 힘드시죠? 일도 하시고 육아도 하시고.” 나의 뒤에 따라오는 꼬리표 엄마. 그리고 여성의 직분. 아시안 여성. 지금 이곳의 괴로움과 그곳의 괴로움 혹은 어려움. 여성 혹은 아시아 여성이라는 꼬리표가 어떤 일을 가로막느냐. 자신을 표현하는데 적극적인 예술가들. 자신을 혁명에 내맡기는 여성들에게 매료된다. 여러 개의 정체성으로 있는 것은 자랑스러워할 일이다. 여성이자 예술가, 교육자이자, 기획자, 아내, 두 개의 직장. 여러 인간적인 가치야말로 예술계 안에서 더욱 고무적인 덕목일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에 더욱 예민해지고, 삶에서 무엇을 우선순위 두는지. 때론 그것이 예술과 별개의 문제일지라도. 결국 이런 생각들이 4명의 여성 예술가 -이하윤, 노혜리, 진오, 전효주-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예술이 포용의 공간으로 변모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여전히 불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으며, 이를 변화시키기 위해 목소리를 낸다. 우리 이전 많은 여성 예술가의 희생과 도전으로 지금의 시대를 산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의 노력을 지속하기 위해서 더 개방적이고 유연해져야 한다. 사고의 유연함, 행동의 유연함. 그 유연함이 지금 이들의 작업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위에 언급한 아티스트 중 그 누구도 페미니즘이나 젠더에 관한 작업을 직접적으로 나타내진 않는다. 하지만 이들이 가진 정체성으로 예술가란 이름으로서 분명 어떤 제한과 한계에 부딪혔을 때, 스스로 어떻게 딛고 일어섬을 안다. 이 자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시선으로 나가야 하는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수많은 정의를 붙이고, 자신의 이야기로 각색되는 작업을 보며 감탄한다.
현재의 시점, 폭풍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혼란의 시기지만, 고민 속에서 4명의 여성 예술가과 라운드 테이블을 찾아준 사람들과 기꺼이 즐겁게 목소리를 내는 시간이었다. 라운드테이블 당일 나눈 수많은 주제 속에서 예측불허의 상태, 불확실성은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과 기대를 할수 있는 또 하나의 관점을 제시했다. 불안한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였다. 색, 빛, 어둠, 세밀한 그림자, 텍스트, 이미지, 언어, 찢어짐과 봉합, 끊임없는 움직임, 재발견, 치유, 불완전함 등 다양한 관점으로 작품을 바라보며, 다 감각적 경험과 정중한 대화의 교류가 있었다. 4명의 여성 예술가의 작업이 우리 공통의 인강성을 중시하고, 타협하고, 교류하고, 서로 존중하기 위한 도구임은 틀림없다. 서로에 대한 편협한 관점을 극복하고, 생존 및 저항 그리고 보호받는 세상을 공동 제작하기 위해 늘 고민하는 예술가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 생각게 했다. 각자가 서 있는 사회, 문화, 인종, 경제적 상황은 다양하다. 예술가가 펼치는 작품세계가 다르듯, 자신만의 관점, 태도를 작품에 투여시킨 여성 예술가들. 이들 이야기가 단순히 고정된 시선이나 관습적 표현이 아닌 유동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래본다.
* 아프리카 반투족의 말인 ‘우분투(Ubuntu)’의 뜻 우분투(Ubuntu): 아프리카 반투족의 말로, "나는 우리가 있기에 존재한다" 또는 **"공동체 의식과 상호 의존"**을 의미하는 철학적 개념.
2025.03.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March.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오렌지 라운드테이블
-뉴욕에서 여성 예술가로 존재하기: 이하윤, 노혜리, 진오, 전효주-
정재연
2024년 12월 4일 오후 5시, 뉴욕 맨하튼에 있는 뉴욕한국문화원. 뉴욕에서 활동하는 여성 예술가 4인과 함께 대화를 나눈다. 이름은 “오렌지 라운드테이블”. 해외에서 활동하는 아시아 여성 예술가들의 다양한 가능성과 미래를 탐구하고, 동시대 현대미술에 관한 관심을 오롯이 이야기 하기 위한 자리였다. <오렌지 라운드테이블>은 여성 예술가들이 주도하는 변화와 에너지를 상징하는 주황색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주황색은 새로운 시작과 변화를 의미하는 색으로, 대화를 나눈 네 명의 여성 예술가 -이하윤, 노혜리, 진오, 전효주- 와 함께 만들어가는 예술적 변화의 흐름을 나타낸다. 필자가 기록한 “오렌지 라운드테이블” 책은 네 명의 여성 예술가가 다루는 매체와 장르 속에서 갖는 구체적 의미, 기능, 관계성을 탐구한다. 글로 존재한 작가들의 작업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들. 설렌다. 글로 끝날 수 있는 시각 매체를 어떤 유형의 형태로 만들 수 있을까? 열린 대화가 답이다.
대화의 기록
예술가들의 작업실은 늘 나에겐 낯설고 낭만적인 공간이다. 2023년부터 2024년까지 작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하며 생각했다. 미술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동하고 변화하는 것이다. 결국, 만남에서 시작해 대화로 이어지며, 예술은 그렇게 탄생한다. 예술의 가치는 직접 참여하여 발견하는 재미, 열린사고와 행동이 예술을 풍성하게 만든다. 대화와 그들의 작업을 기반으로 주고받는 대화의 실천, 그 자체가 예술의 고유 과정이 되는 여정을 살짝 공개한다.
이하윤(Hayoon Jay Lee)은 쌀 작업을 통해 개인을 둘러싼 외부적 환경과 사회, 낯선 문화 그리고 역사 등에 다양한 가치에 질문을 던진다. 미국을 기반으로 조각, 회화, 설치, 퍼포먼스 등 다양한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쌀은 단순하게 음식의 재료뿐만 아니라 문화, 역사, 사회 경제, 정치, 인종 그 이상의 역할을 하기에 작품에선 강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작가는 음식이 우리를 묶어주는 하나의 연결점이라고 말한다. 음식에 대한 상징성은 단순히 민족 정체성으로 정의될 수 없다. 인종, 지역, 젠더, 계급적 차이에 따라 다양한 상징성과 물질적 경험들이 결합하고 어우러져야 한다. 작가는 말한다.
이하윤, Two Mothers-II, 2016, Performance
“음식은 우리를 묶어주고, 연결해 주며, 서로 사랑하게 하죠. 그리고 만나게 해주며, 그 삶의 일부가 되게 해요.” 작가가 펼치는 퍼포먼스는 늘 함께 쌀이라는 오브제가 존재한다.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이 맞을까.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퍼포먼스와 함께 어우러진 작품들은 쌀을 통해 그녀의 사상과 철학을 담은 한 편의 영화와도 같다. “사람들은 절대 혼자 살 수 없어요. 나 혼자만 잘 먹고 잘살면 뭐 해.” 둥글게 원을 만들고 손을 잡은 사람들 머리 위로 쌀이 흘러내린다. 희로애락을 움켜쥐고 기억한다. 2023년 1월, 뉴욕 첼시의 Hollis Taggart 갤러리에서 있었던 퍼포먼스다. 그녀는 쌀이 담긴 천을 찢는다. 인간은 늘 고뇌한다. 삶에는 아픔이 늘 존재한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때에도 나에 대한 연민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 상대방을 포용한다. 포용이 없다면 그녀에게 작업의 동기는 없다. 그녀 자신도 작품을 제작하면서 새롭게 태어나고, 수많은 시작을 거듭하며 위로와 치유를 받는다. “우리는 지금도 살아가고 있어요. 많은 실수와 실패가 있더라도 다시 새롭게 태어나야 해요. 쌀은 내 자신이고 감사와 감동이에요. 쌀은 당신과 나를 연결해 주는 매직입니다.”
노혜리(HyereeRo)는 신체의 움직임과 언어, 그리고 오브제의 교차와 어긋남을 통해 작가의 개인사와 현대사의 직조를 탐구하는 작품을 제작해 왔으며, 공간 내 오브제와 퍼포먼스로 완성되는 작업을 한다. 노혜리와 내가 그녀의 작업실에서 마주 보고 있었을 때 당신이 나를 향해 있었나, 아니면 내가 당신을 향하고 있었던가? 아주 기본적인 물음도 나에게도 기획 소재가 된다. 노혜리의 퍼포먼스를 본 것은 2024년 5월, 뉴욕 차이나타운에 있는 FAR-NEAR 스튜디오에서다. <lunares>라는 제목의 작품은 그녀가 만든 테이블이다. 집에서 사용하는 테이블의 사이즈와 동일하다. 모인 사람들은 테이블 앞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테이블 위에 올라간 아슬아슬한 크고 작은 사물을 만져보고 책의 한 구절씩 읽는다. 작품이 벽에 디스플레이되는 형식이 아닌 사물, 행동 담론, 의미의 영역으로 작품의 범위를 넓혀 나간다. 미술은 이야기할 대상이 필요하고 개념이 필요하다. 미술과 만나는 일은 전시로부터의 탈피다.
노혜리, Haven, 2023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소유할지 고민해요, 저는 살아가는 한 끊임없이 궁금해할 것이고, 탐구하고 작업할 것 같아요. 제가 사물 자체를 대하는 태도는 나의 궁금함에서부터 시작해요.” 라 말한다. 한 공간에서 타인과 함께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 어떤 의견 차이가 있더라도, 조용한 정적만 감돌더라도 모든 시간을 모두 공개함으로써 전시 만들기, 담론 만들기는 이어진다. 목적은 우리가 바라볼 곳을 열어주는가. 아니면 언어를 이끌고 가는가. 그녀가 움직이는 동작 하나 사물 하나가 하나의 언어를 구성한다. 작가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발생하는 모든 것을 탐구하는 것이 어쩌면 그녀가 의도한 부분일지도.
진오(Jean Oh)는 드로잉, 회화, 바느질, 설치 작업 등 회화에 관련된 매체를 스스로 실험하며 그때그때 표현하고 싶은 주제를 다룬다. 천과 바느질에 더 신경을 쓰는 편이지만, 회화와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는지 고민한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2019년, 작고 가녀린 몸에 맑고 다정한 얼굴. 작품을 보고 난 후엔 너무나 다른 느낌의 처절함이었다. 전통회화 작가로서 캔버스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실험을 한다. 가령 미색의 색감을 수백 번 문질러 캔버스 표면을 반복적으로 메운다. 진오를 둘러싸고 있는 곤란함과 긴장감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또한 그녀의 신체에서 손이나 발이 배경 속에 묻힌다. 다양한 캔버스 공간에 시선을 분산시켜 자신을 드러내는 작업을 한다. 가령 계속 보고 있으면 나타나는 눈, 코, 입의 형상이다. 옅은 연필선과 색감, 바느질 흔적 그리고 계속 쌓인 물감은 캔버스 천 안에 스며들어 색이 바랜 느낌마저 든다. 그래서 나는 색이 침투되었다고 표현했다.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스스로 깊은 사람이 되었나? 더 쉽게 내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 아니면 나를 스스로 더 포장해야 하는가? 사실 대학원 졸업 이후에 내 자신을 찾는 데 좀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아요.” 그래서 그녀는 회화에 있어 과감하게 시도하는 것을 감행한다. 나무 지지대 위에 놓여야 할 날것의 캔버스 천을 떼다 물감을 붓고, 헝겊으로 닦아낸 후 말린다. 또 그 위에 또 다시 물감을 붓고, 칠하고, 문지르고, 말리고 기다린다. 그녀가 조절할 수 있는 농도, 질감, 색감을 자유자재로 표현한다. 새로움을 발견할 때 가장 아이처럼 순수한 즐거움을 찾는다고 말한다. 그녀의 말이 아주 뇌리에 깊이 박힌다.
진오, Sniff, 2023, Acrylic and graphite on sewn canvas, 44” x 40”
“제가 계속 작업하면서 성숙해지고, 더 나아진 사람이 되었다 한들 저는 저만의 씻을 수 없는 그 찌질함이 너무 좋거든요.” 이토록 완벽하면서 또한 미성숙하고 조심스러운 그녀의 작업에서 회화 작업의 정의를 내리는 일은 불필요한 일 같다.
전효주(HyojuCheon)는 다학제적 예술가로, 다중매체적 작업을 통해 특정 장소의 조건에 대응하는 공간, 물건 또는 움직이는 몸을 형상화한다. 몸이 공간을 통과하면서 하나의 궤적을 그리고 남긴 물질적 흔적을 기록하는 작업을 한다. 그 기록은 때론 드로잉과 조각으로 혹은, 퍼포먼스로 표현된다. 사실 하나의 작은 조각 혹은 오브제를 만들기 위해 물질과 관계 맺는 방식을 주된 변수로 만드는 게 관건이다. 하지만 어떤 형태를 제작하기 위해서 재료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그 재료의 속성을 따라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전효주에겐 어떤 형태나 흔적을 어떻게 만들어 내는지가 아주 중요했다. 최근엔 신체 움직임과 놀이를 함께 어우를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학부 시절로 돌아가자면, 그녀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을 줄곧 해왔다고 한다. 물론 감정과 공감이 있을 것이고, 소통, 자아 성찰, 선택과 책임, 타인과 함께하는 공동체 의식 등이 있다. 우리의 삶에 시작과 결말이 있을까? 그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녀가 내린 나름의 결론은 ‘무의미한 행동’이다. 우리말로 달리 해석해 보자면 ‘삽질한다’ 가 맞는 표현이겠다. 결국 삽질도 인간만이 할 수 있다.
전효주, 모래성 쌓기: sandcastle building, 2024, basswood, plaster, concrete, sand, dimension variable
반복적이고, 자유롭게 이끌린 움직임, 손끝에서 전해지는 작은 진동과 느낌 조차도 늘 우리는 감각한다. 그녀는 이런 ‘감각에 대한 그리움’으로 작업 아이디어를 구상하기도 한다. 흙과 모래, 그리고 나뭇조각, 소리 같은 것이다. 자연의 파편을 쌓고 또 그걸 무너뜨리는 놀이는 누구라도 쉽사리 할 수 있는 일들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작업의 형성 과정을 놀기도 하고 작업도 같이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체에 대한 발견, 사용 방식을 찾기 위한 시도, 그 물체에 대한 변화 관찰 이 모든 것이 작업이 된다. 금속판을 잘라 두드린 후 철사를 이은 악기 작업, 나무 모서리로 소리를 내는 나무 조각들, 진동으로 미세한 떨림이 만들어 내는 리듬을 선사하는 전동추. 손으로 가지고 놀면서 조작의 재미를 배우고, 조작의 재미는 하나의 대상과 형태의 행동 양식으로 확대된다. 놀이의 존재, 놀이가 어떻게 우리 삶과 연결 되어있는가? 삶 자체 경험이 놀이다. 예술 바깥에서도 언제든 이용할 수 있다.
무엇이든 외면하지 않기로 한다.
<오렌지 라운드테이블>을 기획하기 시작하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다면 앞으로 나가거나, 넓어져야 할 텐데. 물음에서 시작하면 답이 꼭 필요할까. 예술에 근거가 있다면, 근거를 따라 물길을 만들어야 할 텐데. 걱정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여성 예술가들의 작업에 더 눈이 갔던 건 사실이다. 왜 유독 여성 예술가 작업에 몰두하게 되었을까? “어떻게 이 치열한 뉴욕에서 작업하세요.? “여러 예술가 사이에서 어떻게 전시하고, 자신을 증명하세요?” 내가 내뱉으면서도 냉혹한 현실에서 응원의 말이자 물음처럼 느껴진다. 근데 내 자신도 마찬가지다. 되돌아보면 나에게도 적용되는 말들.
“아이 키우면서 어떻게 글을 쓰세요.?” “아이 키우면서 힘드시죠? 일도 하시고 육아도 하시고.” 나의 뒤에 따라오는 꼬리표 엄마. 그리고 여성의 직분. 아시안 여성. 지금 이곳의 괴로움과 그곳의 괴로움 혹은 어려움. 여성 혹은 아시아 여성이라는 꼬리표가 어떤 일을 가로막느냐. 자신을 표현하는데 적극적인 예술가들. 자신을 혁명에 내맡기는 여성들에게 매료된다. 여러 개의 정체성으로 있는 것은 자랑스러워할 일이다. 여성이자 예술가, 교육자이자, 기획자, 아내, 두 개의 직장. 여러 인간적인 가치야말로 예술계 안에서 더욱 고무적인 덕목일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에 더욱 예민해지고, 삶에서 무엇을 우선순위 두는지. 때론 그것이 예술과 별개의 문제일지라도. 결국 이런 생각들이 4명의 여성 예술가 -이하윤, 노혜리, 진오, 전효주-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예술이 포용의 공간으로 변모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여전히 불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으며, 이를 변화시키기 위해 목소리를 낸다. 우리 이전 많은 여성 예술가의 희생과 도전으로 지금의 시대를 산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의 노력을 지속하기 위해서 더 개방적이고 유연해져야 한다. 사고의 유연함, 행동의 유연함. 그 유연함이 지금 이들의 작업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위에 언급한 아티스트 중 그 누구도 페미니즘이나 젠더에 관한 작업을 직접적으로 나타내진 않는다. 하지만 이들이 가진 정체성으로 예술가란 이름으로서 분명 어떤 제한과 한계에 부딪혔을 때, 스스로 어떻게 딛고 일어섬을 안다. 이 자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시선으로 나가야 하는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수많은 정의를 붙이고, 자신의 이야기로 각색되는 작업을 보며 감탄한다.
현재의 시점, 폭풍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혼란의 시기지만, 고민 속에서 4명의 여성 예술가과 라운드 테이블을 찾아준 사람들과 기꺼이 즐겁게 목소리를 내는 시간이었다. 라운드테이블 당일 나눈 수많은 주제 속에서 예측불허의 상태, 불확실성은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과 기대를 할수 있는 또 하나의 관점을 제시했다. 불안한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였다. 색, 빛, 어둠, 세밀한 그림자, 텍스트, 이미지, 언어, 찢어짐과 봉합, 끊임없는 움직임, 재발견, 치유, 불완전함 등 다양한 관점으로 작품을 바라보며, 다 감각적 경험과 정중한 대화의 교류가 있었다. 4명의 여성 예술가의 작업이 우리 공통의 인강성을 중시하고, 타협하고, 교류하고, 서로 존중하기 위한 도구임은 틀림없다. 서로에 대한 편협한 관점을 극복하고, 생존 및 저항 그리고 보호받는 세상을 공동 제작하기 위해 늘 고민하는 예술가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 생각게 했다. 각자가 서 있는 사회, 문화, 인종, 경제적 상황은 다양하다. 예술가가 펼치는 작품세계가 다르듯, 자신만의 관점, 태도를 작품에 투여시킨 여성 예술가들. 이들 이야기가 단순히 고정된 시선이나 관습적 표현이 아닌 유동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래본다.
* 아프리카 반투족의 말인 ‘우분투(Ubuntu)’의 뜻 우분투(Ubuntu): 아프리카 반투족의 말로, "나는 우리가 있기에 존재한다" 또는 **"공동체 의식과 상호 의존"**을 의미하는 철학적 개념.
2025.03.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March.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