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전시를 매일 보는 사람 #2 : 진정성이 대체 뭔데
정희라
미술 노동자 모임의 첫 번째 저녁, 어색함과 들뜬 긴장감이 물러나 소란스럽게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또렷한 눈동자의 한 작가는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아까 말씀하신 진정성이라는 것이 뭔가요?” 누군가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에 참석한, 모르는 이들 가득한 자리여서 ‘당신은 누구인가’ 류의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이리저리 부유하는 말들 끝에 몇 해 전 기획했던 전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해당 전시 작가의 작업이 왜 좋았냐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곧잘 말하던 것이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아 어쩐지 대답하기가 어렵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진정성이 있어서 좋았다는 에두르는 이유를 댄 참이었다. 그래서 그 진정성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라니. 정곡을 찌른 질문인데. 뭐라고 이야기해야 적절할까.
겨우 생각을 공굴리다가 한다는 말이 시간을 많이 들인 작업은 달라 보이지 않냐라는 되물음이었다. 그러나 시간을 들이지 않은 작업이 있나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다른 이야기로 흘러간 후에도 내가 느낀 진정성이 뭐지라는 생각을 하느라 다른 이야기들에 흥미가 떨어졌다. 사전적 의미보다는 ‘스스로에게 가까운 상태’를 추상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자기 진실성[1]과 같은. 진정성이라는 단어는 '진정으로'라는 표현을 할 때 쓰이는 '진정'에서 파생된 단어로 본래의 의미 자체는 ‘진실되게’와 ‘진심’과 거의 동일하다. 미디어에서는 자주 쓰이나, 그 사용의 애매모호함 때문인지 지양되기까지 하는 듯하다. 또 다른 경우인 서양 문학에서는 이 용어의 의미가 정의되어 논의되었고, 한국 문학계에서는 소설 분야의 진정성 연구와 비평이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미술! 진정성의 문제! 이런 제목의 기사들도 흔하다. 그렇지만 진정성은 문제의식만을 정의하지도, 어느 쪽으로 치우친 작업의 주제를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진정성의 의미는 많은 경우의 수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흔히 통용되듯이 내가 언급한 진정성도 진심을 말하는 걸까? 진심이지만 그릇된 것일 수 있고, 허황이지만 옳을 수 있다. 그보다는 진실한 자세, 진짜를 말하고자 하는 마음, 진리과 근원을 탐구하는 태도이려나. 자신의 이야기와 작업 간의 괴리가 없는 진실한 상태일까. 시간을 많이 들였다는 것도 그 의미가 맞을 수도 있겠다. 시간을 들였다는 것은 그것에 몰두했다는 뜻이고, 몰두하는 것은 억지로 할 수 없는 것이니.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에 몰입하여 스스로를 진솔하게 담은 작업은 이미지로든 형식으로든 어떤 식으로든 태가 난다. 거기에 비치는 삶이라는 그 가볍지 않은 무게감 때문에.
싯다르타는 진리를 구하고자 소유하고 있던 많은 것들을 버렸다. 고전에서 흔히 볼 수 있듯 예술의 영역에서 진리를 탐구하고 세상의 진실을 구하고자 가지고 있는 것들을 버리게 된다. 얻고자 하는 것에 버린 것의 무게가 더해진다. 일상을 버리고 얻은 예술의 무게. 세상의 진리에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은 일상이 아닌 다른 차원의 욕망에 가깝다. 그 욕망을 미로 환원하여 내놓은 작업의 찬란함. 외부의 티끌에 변하지 않은 자신만의 색으로 나아가는 작업의 결. 자신의 시간과 삶을 갈아 넣은 작업에 대한 의지. 이것들이 작품에서 층위로 나타날 때 그 사람의 삶이 녹아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앞서 말한 그 작가의 작업에서 느껴진 진정성은 작가의 평소 모습과 맞아떨어지는 작업, 그의 인생이 담긴 작업이라는 점이었다. 실제로 이 작가의 작품들은 이것들이 결합되어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의 반응이 남달랐다. 시기별로 전시된 작업의 양이 많았으며, 작품은 세상의 일들을 구조적으로 담고 있었고, 그 시선에 일관성이 있어 전시장 동선에 따라 이어지는 작품 이야기에 관람객의 집중도는 고조되었다. 관람객들은 작가의 경험이 담긴 작품들의 진솔한 이야기에 귀 기울였고, 자신의 이야기인 듯 그 이야기에 위로를 받았다. 자기 세계를 확인할 때, 우리는 감흥 된다. 인터뷰에서 이 작가는 자신의 그림이 의사의 기술처럼 사람을 살릴 수는 없을지언정 죽지 않게 하였으면 한다고 말하였다.[2] 진정성이 있는 작업의 힘은 어느 때는 이렇게 큰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 작가의 그림으로 위로받고 내일을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은 많은 사람 중의 한 명인 내가 그 진정성의 작은 증인이다.
[1] “진실하고 참된 성질”이란 사전의 추상적 의미보다 일반적 용례와 결을 같이 하는 단어로 ‘자기진실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단어의 어원은 그리스어 아우텐테스(αύθέντης)로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완성한 사람”을 뜻한다, 근대의 자아 개념이 정립되기 전까지 절대자, 지도자에게 주로 사용되었다. <진성성의 기원과 두 점의 초기작>, 김정현, 서울아트가이드 https://www.daljin.com/?WS=31&BC=cv&CNO=390&DNO=19723&PHPSESSID=caed5feff7d7587898a9e24645232ac9
[2]MIMESIS AP6: SIGN 윤석원 작가의 인터뷰 중에서.
2025.05.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May.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한 전시를 매일 보는 사람 #2 : 진정성이 대체 뭔데
정희라
미술 노동자 모임의 첫 번째 저녁, 어색함과 들뜬 긴장감이 물러나 소란스럽게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또렷한 눈동자의 한 작가는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아까 말씀하신 진정성이라는 것이 뭔가요?” 누군가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에 참석한, 모르는 이들 가득한 자리여서 ‘당신은 누구인가’ 류의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이리저리 부유하는 말들 끝에 몇 해 전 기획했던 전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해당 전시 작가의 작업이 왜 좋았냐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곧잘 말하던 것이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아 어쩐지 대답하기가 어렵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진정성이 있어서 좋았다는 에두르는 이유를 댄 참이었다. 그래서 그 진정성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라니. 정곡을 찌른 질문인데. 뭐라고 이야기해야 적절할까.
겨우 생각을 공굴리다가 한다는 말이 시간을 많이 들인 작업은 달라 보이지 않냐라는 되물음이었다. 그러나 시간을 들이지 않은 작업이 있나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다른 이야기로 흘러간 후에도 내가 느낀 진정성이 뭐지라는 생각을 하느라 다른 이야기들에 흥미가 떨어졌다. 사전적 의미보다는 ‘스스로에게 가까운 상태’를 추상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자기 진실성[1]과 같은. 진정성이라는 단어는 '진정으로'라는 표현을 할 때 쓰이는 '진정'에서 파생된 단어로 본래의 의미 자체는 ‘진실되게’와 ‘진심’과 거의 동일하다. 미디어에서는 자주 쓰이나, 그 사용의 애매모호함 때문인지 지양되기까지 하는 듯하다. 또 다른 경우인 서양 문학에서는 이 용어의 의미가 정의되어 논의되었고, 한국 문학계에서는 소설 분야의 진정성 연구와 비평이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미술! 진정성의 문제! 이런 제목의 기사들도 흔하다. 그렇지만 진정성은 문제의식만을 정의하지도, 어느 쪽으로 치우친 작업의 주제를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진정성의 의미는 많은 경우의 수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흔히 통용되듯이 내가 언급한 진정성도 진심을 말하는 걸까? 진심이지만 그릇된 것일 수 있고, 허황이지만 옳을 수 있다. 그보다는 진실한 자세, 진짜를 말하고자 하는 마음, 진리과 근원을 탐구하는 태도이려나. 자신의 이야기와 작업 간의 괴리가 없는 진실한 상태일까. 시간을 많이 들였다는 것도 그 의미가 맞을 수도 있겠다. 시간을 들였다는 것은 그것에 몰두했다는 뜻이고, 몰두하는 것은 억지로 할 수 없는 것이니.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에 몰입하여 스스로를 진솔하게 담은 작업은 이미지로든 형식으로든 어떤 식으로든 태가 난다. 거기에 비치는 삶이라는 그 가볍지 않은 무게감 때문에.
싯다르타는 진리를 구하고자 소유하고 있던 많은 것들을 버렸다. 고전에서 흔히 볼 수 있듯 예술의 영역에서 진리를 탐구하고 세상의 진실을 구하고자 가지고 있는 것들을 버리게 된다. 얻고자 하는 것에 버린 것의 무게가 더해진다. 일상을 버리고 얻은 예술의 무게. 세상의 진리에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은 일상이 아닌 다른 차원의 욕망에 가깝다. 그 욕망을 미로 환원하여 내놓은 작업의 찬란함. 외부의 티끌에 변하지 않은 자신만의 색으로 나아가는 작업의 결. 자신의 시간과 삶을 갈아 넣은 작업에 대한 의지. 이것들이 작품에서 층위로 나타날 때 그 사람의 삶이 녹아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앞서 말한 그 작가의 작업에서 느껴진 진정성은 작가의 평소 모습과 맞아떨어지는 작업, 그의 인생이 담긴 작업이라는 점이었다. 실제로 이 작가의 작품들은 이것들이 결합되어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의 반응이 남달랐다. 시기별로 전시된 작업의 양이 많았으며, 작품은 세상의 일들을 구조적으로 담고 있었고, 그 시선에 일관성이 있어 전시장 동선에 따라 이어지는 작품 이야기에 관람객의 집중도는 고조되었다. 관람객들은 작가의 경험이 담긴 작품들의 진솔한 이야기에 귀 기울였고, 자신의 이야기인 듯 그 이야기에 위로를 받았다. 자기 세계를 확인할 때, 우리는 감흥 된다. 인터뷰에서 이 작가는 자신의 그림이 의사의 기술처럼 사람을 살릴 수는 없을지언정 죽지 않게 하였으면 한다고 말하였다.[2] 진정성이 있는 작업의 힘은 어느 때는 이렇게 큰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 작가의 그림으로 위로받고 내일을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은 많은 사람 중의 한 명인 내가 그 진정성의 작은 증인이다.
[1] “진실하고 참된 성질”이란 사전의 추상적 의미보다 일반적 용례와 결을 같이 하는 단어로 ‘자기진실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단어의 어원은 그리스어 아우텐테스(αύθέντης)로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완성한 사람”을 뜻한다, 근대의 자아 개념이 정립되기 전까지 절대자, 지도자에게 주로 사용되었다. <진성성의 기원과 두 점의 초기작>, 김정현, 서울아트가이드 https://www.daljin.com/?WS=31&BC=cv&CNO=390&DNO=19723&PHPSESSID=caed5feff7d7587898a9e24645232ac9
[2]MIMESIS AP6: SIGN 윤석원 작가의 인터뷰 중에서.
2025.05.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May.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