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그렇게 사는 중입니다
박천, 시안미술관 학예실장
The Pelvis, for Balance_2025
이화영
감정은 생각보다 더 물리적인 방식으로 우리 몸에 쌓인다. 어떤 날은 말수가 줄고 누군가와의 대화를 피하게 되며, 평소보다 작은 소음에도 쉽게 예민해진다. 무언가 특별히 큰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몸은 느리게 움직이고 자주 멈칫거린다. 어떻게도 설명되지 않는 무력감이나 이유 없는 스트레스가 쌓이게 되면 마음이 아닌 몸이 먼저 무너진다. 그렇게 축적된 감정은 몸의 움직임을 넘어 우리가 머무는 공간의 감각까지 바꾸어 놓는다. 일상의 구조가 달라지고 관계의 거리도 변하며 말없이 쌓인 감정은 결국 삶의 배치 방식에까지 스며든다. 무심하게 배치된 물건, 거리를 두고 놓여진 의자, 닫힌 문과 같이 우리 삶에서 감정 혹은 어떤 인물의 정서는 종종 공간의 배치로 은유되어 시각화되기도 한다.
어쩌면 그 모든 것으로도 이를 설명할 수 없기에 "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문장이 등장한 것은 아닐까. 이불 밖은 언제나 사건이 일어나는 공간이자 장소이지만 이불 속은 설명되지 않는 감정을 숨기기에 가장 쉽고도 명확한 자리가 되기 때문이다. 얇은 이불 한 겹은 세상과 나 사이를 분리하기도, 반대로 나를 보호하는 감정적 경계선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감정은 느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세계와 나 사이의 물리적경계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감정은 심리의 문제가 아니라 공간의 문제로 변환된다.
그렇다면 감정을 감싸는 모습을 어떻게 시각화될 수 있을까. 〈To Cage or Be Caged〉는 그 질문에 가장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여성의 신체처럼 보이는 형상은 아마 작가 본인을 은유하는 것이겠고 이를 끈으로 칭칭 감고 있는 모습은 이불 속보다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끈은 일정한 패턴 없이 때로는 신경질적으로 몸(작품)의 표면을 감고 들어간다. 일정한 규칙을 따르기보다 감정의 덩어리를 억지로 눌러 덮는 듯한 감기 방식은, 어떤 통제를 향한 시도이기보다는 오히려 통제 불가능한 상태의 발현처럼 보인다. 끈이 지나간 자리는 흔적처럼 남아 그 자체로 긴장을 품은 선이 되고 얇은 표피, 아니 그 내부까지 조이듯 감정을 더욱 압축시키려 한다. 작가는 이 불균일하고 강박적인 휘감기를 통해 감정이 다스려지지 못하고 쌓여가는 상태, 보호하려는 의지가 되레 불안을 드러내는 순간을 시각화한다. 결국 감정은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며 말 대신 몸의 구조에 침전된다.
그렇게 숨긴다고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말로 꺼내지 못하고 몸 밖으로 밀어내지 못한 감정은 안쪽에 쌓이고 눌리며 서서히 굳는다. 전해지지 못한 감정은 결국 단단해지고 그 상태로 응고된다. 〈Keep or Lock〉은 그런 감정의 상태가 형상으로 드러난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토르소는 감정이 내부에 쌓이게 됐을 때 짓눌릴 만큼의 무게와 압력을 은유한다. 시멘트는 마르기 전에는 유연하지만 굳은 뒤에는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형태가 된다. 끈적한 물감이 흘러내리는 머리의 형상 위로 감정을 붙잡듯 끈이 불규칙하게 휘감겨 있다. 그 휘감김은 조율이 아니라 통제 불능의 반복처럼, 감정의 상태는 조여지고 봉인되고 굳어진다. 감정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은 결국 감정이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잠그는 장치로 변하는 것이다.
빠져나오지 못한 감정은 버텨야 하는 무게로 남는다. 어떻게든 모양은 잡고 있지만 균형이라고 부르기엔 다소 위태롭다. 〈The Pelvis, for Balance〉는 감정이 흔들리는 상태를 유지하며 버티는 방식에 대해 말한다. 골반은 몸의 중심을 떠안고 있는 구조이자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무게와 아래에서 받쳐야 하는 압력을 동시에 흡수하는 부위이다. 이 작업에서 철망으로 형상화된 골반 구조는 양쪽 표면이 고르지 않게 벌어져 있고 그 사이에 중심을 잡으려 애쓰는 추가 매달려 있다. 그 모습은 성공적으로 균형을 맞추고 있다기보다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 중심을 잡으려는 몸의 발버둥에 가까워 보인다. 감정 또한 어떤 중심 위에서 완전한 안정을 추구하지 않는다. 감정의 속성상 '완전한 안정'은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이기에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하나의 감정에 침식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조율을 시도하며 가까스로 존재하는 것이다. 〈The Pelvis, for Balance〉는 그 감정의 태도를 조형적으로 붙잡고 있다. 흔히 쓰이는 요즘 말로 치환하자면 아슬아슬하게 ‘존버’ 중인 상태로.
버티기 위해 몸을 굳힌 상태에서도 감정은 완전히 멈춰 있지 않는다. 억제된 감각은 안쪽 어딘가에서 계속 진동하고 그 진동은 아주 미세하게 방향을 바꾼다. 움직이지 않으려는 몸이 그 안에서조차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은 늦게서야 감지된다. 얇게 벌어진 틈을 따라 스쳐 나온 감정은 곧장 다른 감정에 닿게 된다. 〈Inside the Trap〉은 이러한 감정들의 연결과 반응을 공간 안에 설치한 작업이다. 정면도 없고 중심도 없는 이 실의 얽힘은 규칙 없이 뻗어 있고 일정한 간격도 흐름도 없다. 일견 통과할 수 있는 '경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안에서 스스로가 어느 지점에 붙들려 있는지를 인식할 수 있도록 제안한다. 이 작품 안에서 관객은 실의 사이를 무심하게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실에 닿을까봐 망설이는 움직임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망설임은 스스로의 감정이 어디에 위치해있는지를 질문하게 한다.
감정을 감추고 눌러 담고 봉인한 채 버텨내는 방식은 보편적인 현대인의 모습이 되었다. 빠르게 흐르는 유행 탓에 최근에는 잘 쓰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너무 유명한 "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문장은 되도록 스스로를 보호하고 감정을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리고 "존버" 역시 농담이나 은어를 넘어 감정을 감춰야만 이 삶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략을 설명하는 문장이 되었다. 이화영은 이러한 단어를 이 전시에서 표현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가의 작업에 있어 시발점이 되는 감정들은 특정한 사건이나 드라마틱한 이야기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보편적이고 평범한 우리의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는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서 축적되고 억제되고 감춰지며 조용히 사회를 이루는 감정들이다. 이러한 감정들은 해소되기보다는 내면 어딘가의 한편에 지속적으로 위치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어쩌면 이 전시를 통해 보여주는 감정의 면면은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감정이 이미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2025.07.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uly.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그냥 그렇게 사는 중입니다
박천, 시안미술관 학예실장
The Pelvis, for Balance_2025
이화영
감정은 생각보다 더 물리적인 방식으로 우리 몸에 쌓인다. 어떤 날은 말수가 줄고 누군가와의 대화를 피하게 되며, 평소보다 작은 소음에도 쉽게 예민해진다. 무언가 특별히 큰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몸은 느리게 움직이고 자주 멈칫거린다. 어떻게도 설명되지 않는 무력감이나 이유 없는 스트레스가 쌓이게 되면 마음이 아닌 몸이 먼저 무너진다. 그렇게 축적된 감정은 몸의 움직임을 넘어 우리가 머무는 공간의 감각까지 바꾸어 놓는다. 일상의 구조가 달라지고 관계의 거리도 변하며 말없이 쌓인 감정은 결국 삶의 배치 방식에까지 스며든다. 무심하게 배치된 물건, 거리를 두고 놓여진 의자, 닫힌 문과 같이 우리 삶에서 감정 혹은 어떤 인물의 정서는 종종 공간의 배치로 은유되어 시각화되기도 한다.
어쩌면 그 모든 것으로도 이를 설명할 수 없기에 "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문장이 등장한 것은 아닐까. 이불 밖은 언제나 사건이 일어나는 공간이자 장소이지만 이불 속은 설명되지 않는 감정을 숨기기에 가장 쉽고도 명확한 자리가 되기 때문이다. 얇은 이불 한 겹은 세상과 나 사이를 분리하기도, 반대로 나를 보호하는 감정적 경계선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감정은 느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세계와 나 사이의 물리적경계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감정은 심리의 문제가 아니라 공간의 문제로 변환된다.
그렇다면 감정을 감싸는 모습을 어떻게 시각화될 수 있을까. 〈To Cage or Be Caged〉는 그 질문에 가장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여성의 신체처럼 보이는 형상은 아마 작가 본인을 은유하는 것이겠고 이를 끈으로 칭칭 감고 있는 모습은 이불 속보다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끈은 일정한 패턴 없이 때로는 신경질적으로 몸(작품)의 표면을 감고 들어간다. 일정한 규칙을 따르기보다 감정의 덩어리를 억지로 눌러 덮는 듯한 감기 방식은, 어떤 통제를 향한 시도이기보다는 오히려 통제 불가능한 상태의 발현처럼 보인다. 끈이 지나간 자리는 흔적처럼 남아 그 자체로 긴장을 품은 선이 되고 얇은 표피, 아니 그 내부까지 조이듯 감정을 더욱 압축시키려 한다. 작가는 이 불균일하고 강박적인 휘감기를 통해 감정이 다스려지지 못하고 쌓여가는 상태, 보호하려는 의지가 되레 불안을 드러내는 순간을 시각화한다. 결국 감정은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며 말 대신 몸의 구조에 침전된다.
그렇게 숨긴다고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말로 꺼내지 못하고 몸 밖으로 밀어내지 못한 감정은 안쪽에 쌓이고 눌리며 서서히 굳는다. 전해지지 못한 감정은 결국 단단해지고 그 상태로 응고된다. 〈Keep or Lock〉은 그런 감정의 상태가 형상으로 드러난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토르소는 감정이 내부에 쌓이게 됐을 때 짓눌릴 만큼의 무게와 압력을 은유한다. 시멘트는 마르기 전에는 유연하지만 굳은 뒤에는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형태가 된다. 끈적한 물감이 흘러내리는 머리의 형상 위로 감정을 붙잡듯 끈이 불규칙하게 휘감겨 있다. 그 휘감김은 조율이 아니라 통제 불능의 반복처럼, 감정의 상태는 조여지고 봉인되고 굳어진다. 감정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은 결국 감정이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잠그는 장치로 변하는 것이다.
빠져나오지 못한 감정은 버텨야 하는 무게로 남는다. 어떻게든 모양은 잡고 있지만 균형이라고 부르기엔 다소 위태롭다. 〈The Pelvis, for Balance〉는 감정이 흔들리는 상태를 유지하며 버티는 방식에 대해 말한다. 골반은 몸의 중심을 떠안고 있는 구조이자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무게와 아래에서 받쳐야 하는 압력을 동시에 흡수하는 부위이다. 이 작업에서 철망으로 형상화된 골반 구조는 양쪽 표면이 고르지 않게 벌어져 있고 그 사이에 중심을 잡으려 애쓰는 추가 매달려 있다. 그 모습은 성공적으로 균형을 맞추고 있다기보다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 중심을 잡으려는 몸의 발버둥에 가까워 보인다. 감정 또한 어떤 중심 위에서 완전한 안정을 추구하지 않는다. 감정의 속성상 '완전한 안정'은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이기에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하나의 감정에 침식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조율을 시도하며 가까스로 존재하는 것이다. 〈The Pelvis, for Balance〉는 그 감정의 태도를 조형적으로 붙잡고 있다. 흔히 쓰이는 요즘 말로 치환하자면 아슬아슬하게 ‘존버’ 중인 상태로.
버티기 위해 몸을 굳힌 상태에서도 감정은 완전히 멈춰 있지 않는다. 억제된 감각은 안쪽 어딘가에서 계속 진동하고 그 진동은 아주 미세하게 방향을 바꾼다. 움직이지 않으려는 몸이 그 안에서조차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은 늦게서야 감지된다. 얇게 벌어진 틈을 따라 스쳐 나온 감정은 곧장 다른 감정에 닿게 된다. 〈Inside the Trap〉은 이러한 감정들의 연결과 반응을 공간 안에 설치한 작업이다. 정면도 없고 중심도 없는 이 실의 얽힘은 규칙 없이 뻗어 있고 일정한 간격도 흐름도 없다. 일견 통과할 수 있는 '경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안에서 스스로가 어느 지점에 붙들려 있는지를 인식할 수 있도록 제안한다. 이 작품 안에서 관객은 실의 사이를 무심하게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실에 닿을까봐 망설이는 움직임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망설임은 스스로의 감정이 어디에 위치해있는지를 질문하게 한다.
감정을 감추고 눌러 담고 봉인한 채 버텨내는 방식은 보편적인 현대인의 모습이 되었다. 빠르게 흐르는 유행 탓에 최근에는 잘 쓰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너무 유명한 "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문장은 되도록 스스로를 보호하고 감정을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리고 "존버" 역시 농담이나 은어를 넘어 감정을 감춰야만 이 삶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략을 설명하는 문장이 되었다. 이화영은 이러한 단어를 이 전시에서 표현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가의 작업에 있어 시발점이 되는 감정들은 특정한 사건이나 드라마틱한 이야기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보편적이고 평범한 우리의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는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서 축적되고 억제되고 감춰지며 조용히 사회를 이루는 감정들이다. 이러한 감정들은 해소되기보다는 내면 어딘가의 한편에 지속적으로 위치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어쩌면 이 전시를 통해 보여주는 감정의 면면은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감정이 이미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2025.07.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uly.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