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서초문화재단 전시기획공모 선정 전시 《이 전시장 몇 평 인가요?》
재료와 레시피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Younggi Kim (Deputy Director, OCI Museum of Art)
전시기획자의 차별성은 어디에서 올까? 최소한의 자의식이 있는 기획자라면, 한 줌의 소재라도, 아니 그 소재에서 똑 떨어진 부스러기 하나에서도, 천차만별 각양각색 저마다 겹치지 않는 이야기를 할 것이다. 성향과 관점에서 이미 평행선 없이 저마다 뻗어 나간다. ‘누가’에서부터 이미 달라졌다. 한편, ‘언제’ 즉 시의성도 관건이다. 대한제국 말기에 인력거 사업을 다루면 사회상, 빈부, 이권의 그루브였겠지만, 지금 하면 다들 이벤트나 관광산업을 떠올릴 것이다. 동일한 견지에도 어조에 따라 하늘과 땅을 오간다. “변화는 바람직하다”, “바뀌길 기대한다”, “전환점이 필요하다”, “개혁에 앞장서리”, “일어나 나를 따르라”가 같지 않다. 마치 예술가의 문제의식과 사회적 역할을 촉구함에 있어, 그런 눈을 다만 간직하는 것과, 최전선에서 아방가르드하게 맞서 싸움은 그 수위가 다른 것처럼. 아울러 ‘어디’ 또한 중요하다. 상황이나 맥락, 물리적인 장소 혹은 기관은 확실히 그 자체로 서로 다른 의미가 묻는다.
마치 방향성의 차이처럼 이야기했지만 ‘누가, 언제, 어디’는 ‘누구와 함께할지’, ‘언제쯤 가능할지’, ‘어디에 동조할지’의 줄임말이고, 진실한 차이는 결국 동원 가능한 인적/물적 자원의 양적/질적 격차이다. 혹시 그런 걸로도 어찌할 수 없는, 시대와 장소 상황을 막론하는 바탕은 없을까? 아무래도 ‘아이템’과 ‘화법’이 있을 것이다. 육하원칙에서 ‘누가, 언제, 어디’는 했으니 남은 갈림길은 ‘무엇을, 어떻게’인 것. 참, ‘왜’는 모든 갈림길에 골고루 녹아 있으니 논의한 걸로 치자.
전시는 우선 아이템이 매력적이어야 유리하다. 현대인은 성급하고 산만하며 인내심과 관용이 없다. 매력적이지 않은 곳에 나눠 줄 시선과 관심, 시간? 누군가 말했듯 우리에게 그런 건 있을 수가 없다. 구성 이전에 아이템이 매력적일 이유는? 구성이 매력적인지 파악하는 비용도 아까워하니까. 활어 횟감처럼 애초 재료가 싱싱 팔팔 신선해야 한다. 매력적인 건 무엇인가? 현대인은 (참 쓸데없게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태생적 관심사나 매몰 비용, 하차에 따른 리스크가 큰 기존의 활동 이외의 무언가에 자발적 능동적으로 몰입하지 않는다. 관심이, 저수지에 가득 찬 물과 같다면, 파도처럼 몰아치거나 분수처럼 솟을 기대를 말란 것. 그럼 남은 건, 둑을 트든, 바닥에 구멍을 내든 더 낮은 쪽으로 물이 흐르게 만들 수밖에. 말하자면 진입 장벽이 낮아야 한다. 익숙하든, 강제로 엮여 있든, 관심이 가든, 최근 이슈이든, 잘 몰라도 우선 좋거나 비싸 보이든, 아무튼 봐야 할 것 같든, 쉽거나 만만하든, 하다못해 이유 없다는 이유라도 있든, 어떤 형태로든 말이다.
‘평’이란 아이템은 매력적이다. 단위이자 면적이자 가치의 척도이자 가늠의 기준이다. 표현마저 대유적이다. 산업과 기하학과 재테크와 생활과 문화예술에 두루 걸쳐 있다. 일단 알 것 같은(기분이 드는) 사람이 많다. ‘대유’라 했는데, 매력적인 소재, 작품, 전시는 대개 대유의 속성이 강하다. 사소하고 별거 아닌 조그만 아이템인데, 풀수록 동서남북 서로 다른 이야깃거리가 많다. 짧은 줄거리에도 되새기고 곱씹는 맛이 무궁무진하다, 마치 단물 마르지 않는 껌처럼. 생김새가 있다면 고차원의 다포체처럼 좁고도 드넓은 모양일 것이다. ‘평’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가. 처음 듣고 키워드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관점과 화법을 살펴보자. 김소현, 이민영 기획자는 평의 양면성에 주목한다. 평은 당장 드러누운 자리에 딱 들어맞을 만큼 감각과 신체에 기반하면서도, 현대인의 계급 척도 노릇을 할 정도로 의식적, 관념적이다. 평은 비표준적이고 비효율적인 과거의 잔재이면서, 여전히 생명력 넘치는, 그래서 벗어나기 힘든 직관적인 기준이다. 평은 다분히 수학적이고 산업적인 서늘한 단위이면서, 또한 상전과 아랫것, 지주와 소작농, 부동산과 맘카페의 의식을 연대하는 역사성 넘치고 인류학적이며 뜨끈뜨끈 끈적한 단위이기도 하다. 다만, 두 기획자의 텍스트와 인터뷰에 자주 등장하는 ‘모호성’이 흐리멍덩함을 뜻하진 않는다. 마치 한국인 아빠와 일본인 엄마와 나란히 앉아 한일전을 관람하는 열성 축구 팬의 우왕좌왕 응원 구호 같은 것이다. 양쪽 모두 너무 선명하면 하나의 합의점은 부족하다. ‘점’의 형태가 아니라 면이나 구름의 형상처럼 범위로 분포할 것이다. 전시장을 채운 여섯 작가의 작업은 그 스펙트럼이 무척 넓다. 평의 수많은 합의점을 각자의 방식으로 저 멀리 시각화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각오 없이 들어선 관객들이 어리둥절하거나 당혹스러울 만큼. 부디 그 ‘접점의 구름’ 이미지를 머릿속에 떠올린 채 전시장을 여러 차례 돌아보길 힘주어 권한다.
내가 선호하는 직관적인 화법이 만능은 아니다. 만능이나 능사를 정하거나 발견하면 미술씬의 매력은 수십 분의 일로 줄 것이다. 주눅이 든 관객에게 의지할 지팡이 하나를 건네면 충분하다. 기획이 추구하는 방향이 이미지화하거나 물화해, 마치 지팡이나 팻말처럼 다가오면 얼마나 안심이 될까. “이 전시는 돌리고, 돌리고, 또 돌려 말한답니다. 한 번에 이해하면 큰일 나는 전시이죠.” 세상에 의도 없는 작품, 의도 없는 전시는 없다. 의도가 없다는 의도가 있을 뿐. 어떤 형태로든 짚게 하는 게 바로 기획자의 본분이다.
2025.03.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March.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2024 서초문화재단 전시기획공모 선정 전시 《이 전시장 몇 평 인가요?》
재료와 레시피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Younggi Kim (Deputy Director, OCI Museum of Art)
전시기획자의 차별성은 어디에서 올까? 최소한의 자의식이 있는 기획자라면, 한 줌의 소재라도, 아니 그 소재에서 똑 떨어진 부스러기 하나에서도, 천차만별 각양각색 저마다 겹치지 않는 이야기를 할 것이다. 성향과 관점에서 이미 평행선 없이 저마다 뻗어 나간다. ‘누가’에서부터 이미 달라졌다. 한편, ‘언제’ 즉 시의성도 관건이다. 대한제국 말기에 인력거 사업을 다루면 사회상, 빈부, 이권의 그루브였겠지만, 지금 하면 다들 이벤트나 관광산업을 떠올릴 것이다. 동일한 견지에도 어조에 따라 하늘과 땅을 오간다. “변화는 바람직하다”, “바뀌길 기대한다”, “전환점이 필요하다”, “개혁에 앞장서리”, “일어나 나를 따르라”가 같지 않다. 마치 예술가의 문제의식과 사회적 역할을 촉구함에 있어, 그런 눈을 다만 간직하는 것과, 최전선에서 아방가르드하게 맞서 싸움은 그 수위가 다른 것처럼. 아울러 ‘어디’ 또한 중요하다. 상황이나 맥락, 물리적인 장소 혹은 기관은 확실히 그 자체로 서로 다른 의미가 묻는다.
마치 방향성의 차이처럼 이야기했지만 ‘누가, 언제, 어디’는 ‘누구와 함께할지’, ‘언제쯤 가능할지’, ‘어디에 동조할지’의 줄임말이고, 진실한 차이는 결국 동원 가능한 인적/물적 자원의 양적/질적 격차이다. 혹시 그런 걸로도 어찌할 수 없는, 시대와 장소 상황을 막론하는 바탕은 없을까? 아무래도 ‘아이템’과 ‘화법’이 있을 것이다. 육하원칙에서 ‘누가, 언제, 어디’는 했으니 남은 갈림길은 ‘무엇을, 어떻게’인 것. 참, ‘왜’는 모든 갈림길에 골고루 녹아 있으니 논의한 걸로 치자.
전시는 우선 아이템이 매력적이어야 유리하다. 현대인은 성급하고 산만하며 인내심과 관용이 없다. 매력적이지 않은 곳에 나눠 줄 시선과 관심, 시간? 누군가 말했듯 우리에게 그런 건 있을 수가 없다. 구성 이전에 아이템이 매력적일 이유는? 구성이 매력적인지 파악하는 비용도 아까워하니까. 활어 횟감처럼 애초 재료가 싱싱 팔팔 신선해야 한다. 매력적인 건 무엇인가? 현대인은 (참 쓸데없게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태생적 관심사나 매몰 비용, 하차에 따른 리스크가 큰 기존의 활동 이외의 무언가에 자발적 능동적으로 몰입하지 않는다. 관심이, 저수지에 가득 찬 물과 같다면, 파도처럼 몰아치거나 분수처럼 솟을 기대를 말란 것. 그럼 남은 건, 둑을 트든, 바닥에 구멍을 내든 더 낮은 쪽으로 물이 흐르게 만들 수밖에. 말하자면 진입 장벽이 낮아야 한다. 익숙하든, 강제로 엮여 있든, 관심이 가든, 최근 이슈이든, 잘 몰라도 우선 좋거나 비싸 보이든, 아무튼 봐야 할 것 같든, 쉽거나 만만하든, 하다못해 이유 없다는 이유라도 있든, 어떤 형태로든 말이다.
‘평’이란 아이템은 매력적이다. 단위이자 면적이자 가치의 척도이자 가늠의 기준이다. 표현마저 대유적이다. 산업과 기하학과 재테크와 생활과 문화예술에 두루 걸쳐 있다. 일단 알 것 같은(기분이 드는) 사람이 많다. ‘대유’라 했는데, 매력적인 소재, 작품, 전시는 대개 대유의 속성이 강하다. 사소하고 별거 아닌 조그만 아이템인데, 풀수록 동서남북 서로 다른 이야깃거리가 많다. 짧은 줄거리에도 되새기고 곱씹는 맛이 무궁무진하다, 마치 단물 마르지 않는 껌처럼. 생김새가 있다면 고차원의 다포체처럼 좁고도 드넓은 모양일 것이다. ‘평’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가. 처음 듣고 키워드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관점과 화법을 살펴보자. 김소현, 이민영 기획자는 평의 양면성에 주목한다. 평은 당장 드러누운 자리에 딱 들어맞을 만큼 감각과 신체에 기반하면서도, 현대인의 계급 척도 노릇을 할 정도로 의식적, 관념적이다. 평은 비표준적이고 비효율적인 과거의 잔재이면서, 여전히 생명력 넘치는, 그래서 벗어나기 힘든 직관적인 기준이다. 평은 다분히 수학적이고 산업적인 서늘한 단위이면서, 또한 상전과 아랫것, 지주와 소작농, 부동산과 맘카페의 의식을 연대하는 역사성 넘치고 인류학적이며 뜨끈뜨끈 끈적한 단위이기도 하다. 다만, 두 기획자의 텍스트와 인터뷰에 자주 등장하는 ‘모호성’이 흐리멍덩함을 뜻하진 않는다. 마치 한국인 아빠와 일본인 엄마와 나란히 앉아 한일전을 관람하는 열성 축구 팬의 우왕좌왕 응원 구호 같은 것이다. 양쪽 모두 너무 선명하면 하나의 합의점은 부족하다. ‘점’의 형태가 아니라 면이나 구름의 형상처럼 범위로 분포할 것이다. 전시장을 채운 여섯 작가의 작업은 그 스펙트럼이 무척 넓다. 평의 수많은 합의점을 각자의 방식으로 저 멀리 시각화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각오 없이 들어선 관객들이 어리둥절하거나 당혹스러울 만큼. 부디 그 ‘접점의 구름’ 이미지를 머릿속에 떠올린 채 전시장을 여러 차례 돌아보길 힘주어 권한다.
내가 선호하는 직관적인 화법이 만능은 아니다. 만능이나 능사를 정하거나 발견하면 미술씬의 매력은 수십 분의 일로 줄 것이다. 주눅이 든 관객에게 의지할 지팡이 하나를 건네면 충분하다. 기획이 추구하는 방향이 이미지화하거나 물화해, 마치 지팡이나 팻말처럼 다가오면 얼마나 안심이 될까. “이 전시는 돌리고, 돌리고, 또 돌려 말한답니다. 한 번에 이해하면 큰일 나는 전시이죠.” 세상에 의도 없는 작품, 의도 없는 전시는 없다. 의도가 없다는 의도가 있을 뿐. 어떤 형태로든 짚게 하는 게 바로 기획자의 본분이다.
2025.03.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March.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