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갤러리스트>는 어린왕자를 샘플링한 픽션을 가장한 에세이이며, 본문에 나오는 인물은 특정 인물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이미지들은 생성형 AI를 통해 제작해보았습니다.
어린 갤러리스트
박준수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너무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화가 모자라고 부르던 베레모를 쓰고 계신 모습과, 보라매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나를 위해 공원을 산책하다 주워 오신 도토리를 갖고 놀라며 내 손에 쥐어 주시던 모습으로 어렴풋하게 기억날 뿐이다. 오히려 할아버지의 다락방에 있던 캔버스와 유화 물감이 잔뜩 묻은 붓, 나이프, 팔레트, 오일통, 그리고 집안 곳곳에 걸려있던 그림들은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래서 어렸을 때 할아버지 그림을 자주 따라 그렸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니 내가 그린 그림을 보고 미술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재능이 있다고 했다. 특별히 예술적 재능이 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작품을 많이 보고 자란 덕분에 또래 친구들보다 조금 더 인물이나 풍경을 잘 따라 그렸을 뿐이다. 하지만 막상 미대를 가니 어른들은 이렇게 그림을 그려서는 안된다며 차라리 이론을 공부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이런 연유로 나는 나이 스물 둘에 화가라는 멋진 직업을 포기해 버렸다. 입시 미술을 할 땐 칭찬받던 내 석고수채화들이 미대에서는 외면당했다. 그렇다면 왜 이걸로 시험을 봐서 뽑은거지?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더 이상 창작과 비평의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쉽게 붓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나는 다른 직업을 택해야 했기에 갤러리와 아트페어에서 일하는 법을 배웠다. 미술 시장 일은 세계 곳곳을 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기에, 이렇게 일생을 살아오는 동안 나는 수많은 진지한 사람들과 수많은 만남을 가졌다. 어른들 세계에서 많이 살았다는 얘기다. 나는 그들을 매우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었다. 어른들은 일에 지쳐 있거나, 욕심이 많거나, 겉과 속이 다르거나, 화가 나 있었다.
그러다보니 점점 나도 그런 어른이 되어 가는 것 같아 모든 것을 두고 머나먼 곳으로 떠났다. 나를 아무도 모르고 말도 통하지 않는 머나먼 땅에 도착했다. 그리고 며칠 후 아직 미술 시장을 잘 모르는 때 묻지 않고 순순한 어린 갤러리스트 (지망생)을 만났다.
나는 유치원생보다 못한 나의 어학 능력 향상을 위해 매일 비슷한 시간에 어린 갤러리스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루하루 나는 그가 일했던 갤러리들과, 그가 만났던 다양한 갤러리 대표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어린 갤러리스트가 일하는 갤러리는 B 에비뉴 612 스트리트에 있는 아주 작은 갤러리였다. 갤러리 대표는 늘 바빠 갤러리에 거의 오지 않았기에 그는 출근해서 혼자 모든 일을 했다. 몇 점 되지 않는 작품들의 먼지를 털고, 유리창을 닦았다. 바닥 청소에 옆 건물과 함께 쓰는 작은 화장실까지 청소하고 나면, 문 앞에 있는 작은 리셉션 데스크에 앉아 대표 앞으로 온 명품 백화점 카탈로그들를 정리해 폐지함에 넣는 일을 했다. 일주일에 한 두 번 오는 갤러리 대표는 항상 선생님처럼 가르치는 태도를 취하며 어린 갤러리스트에게 공손하고 단정해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 갤러리 대표는 항상 반말을 했는데, 공손하고 단정하게 말을 건네는 날은 이미 두달치 밀린 월급 이야기를 꺼낼 때였다. 어린 갤러리스트는 전시 기획을 하고 싶었다. 나중에는 자기 이름으로 갤러리를 내고도 싶어 밀린 월급에도 그만두지 못하고 다니고 있었다.
B 에비뉴 612 스트리트에는 다른 갤러리들도 있었다. 325, 326, 327, 328, 329, 330 갤러리였다. 그는 일자리도 찾고 가르침도 구할 겸 해서 다른 갤러리들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첫 번째 갤러리에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멜서스의 인구론을 열심히 읽는 325 대표가 있었다. 그는 어린 갤러리스트가 오는 것을 보자 큰소리로 외쳤다.
“내 말은 곧 법이니 무조건 해라!”
어린 갤러리스트는 의아스러워 반문했다.
“혹시 대표님께서 시키신 일이 틀린 일이면 어떻게 하죠?”
325 갤러리 대표는 다시 큰소리로 외쳤다.
“내 말이 틀릴리가 없으나, 틀리더라도 그 책임은 내가 진다. 토달지 말고 무조건 해라”
“하지만…”
“흠! 흠!”
자꾸 어린 갤러리스트가 반문을 하려하자, 325 갤러리 대표는 화난 기색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권위가 존중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반항은 용납될 수 없었다. 그는 절대 군주였다. 325 갤러리 대표는 거침없이 말했다.
“불복종은 용서치 않노라.”
어린 갤러리스트는 그러한 대단한 권력에 경탄했다.
“여기서 제가 할 일은 없군요. 다시 떠나겠어요!”
직원이 하나 생긴 것을 자랑스러워하던 대표가 답했다.
“떠나지 마라, 떠나지 마라. 내가 너를 팀장에 임명하겠노라!”
“무슨 팀장요?”
“음.. 전시팀장!”
“하지만 팀원이 없잖아요!”
“그건 모를 일이다. 팀원은 팀장이 뽑아야 할 일이다.”
“아무래도 떠나야 겠네요.”
“그건 안 돼.”
대표가 말했다.
어린 갤러리스트는 떠날 채비를 마쳤으나 대표를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다. 조용히 갤러리 문을 열고 나갔다.
326 갤러리에는 허영쟁이 대표가 있었다. 어린 갤러리스트를 보자마자 326 갤러리 대표는 멀리서부터 외쳤다.
“오! 우리 갤러리로 컬렉터가 오는구만!”
어린 갤러리스트는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컬렉터가 아니라 갤러리스트인걸요.”
“오! 그렇다면 우리 갤러리에서 일을 해. 우리 갤러리에서 일하면 나중에 큰 컬렉터가 될 수 있지.”
“월급을 많이 주시나요?”
“월급 대신 작품을 주겠네.”
“저는 작품 말고 생활비가 필요한걸요.”
“나중에 작품을 팔면 큰 돈을 벌텐데?”
“그게 언제인데요?”
“좋은 작품이라 언제라도 네가 돈이 필요할 때 팔면 돼.”
“그러면 대표님이 팔아서 월급으로 주시면 되잖아요?”
“후회할텐데, 정말 좋은 작품이야.”
“저는 당장 월급을 받고 싶어요.”
“미련하군. 큰 돈을 벌어서 컬렉터가 되고 싶지 않은가?”
어린 갤러리스트는 월급 대신 작품을 주겠다는 326 갤러리 대표에게 등을 돌리고 일어났다.
327 갤러리에는 주사가 있는 대표가 있었다. 이번 방문은 매우 짧았지만 충격은 엄청 났다.
빈 병 한 무더기와 가득한 병 무더기 앞에 말없이 앉아 있는 주정뱅이 대표는 덥썩 어린 갤러리스트의 손을 잡았다. 놀라서 손을 빼자 주정뱅이 대표는 술에 취한 부정확한 발음으로 외쳤다.
“너 이 판에서 일하고 싶지 않아!”
어린 갤러리스트는 대꾸도 안하고, 갤러리 문을 박차고 나왔다. 놀라서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주정뱅이의 협박에 겁이 나진 않았다.
328 갤러리에는 사업가 대표가 있었다. 어린 갤러리스트가 들어갔지만 328 대표는 하도 바빠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어린 갤러리스트가 그에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벽에 걸린 작품들이 어디서 본 듯 한 작품인대요.”
“오억이야!”
“하지만 유명한 그 작가 작품은 아닌 것 같은걸요.”
“너가 모든 작가를 다 알아! 오억이야!”
“뭐가 오억인데?”
사업가 대표가 고개를 들었다.
“내가 삼십 년을 이 판에서 굴렀는데, 방해받은 건 딱 세 번뿐이야. 첫 번째는 이십년 전, 대기업 블랙머니가 엮여 국세청 조사를 받을 때였지. 두 번째는 십년 전, 내가 판 작품이 위작 논란에 휩싸여 컬렉터들이 문 앞에서 농성할 때 였지. 세 번째가 바로 지금이야! 가만 있자. 그 사이에 옥션에 올라왔으니, 오억 일백만이던가…?”
“뭐가 그새 백만이 오른거에요?”
“원래 다 그런거야! 작품 가격은 주식과 부동산과 달리 계속 올라!”
“누가 사는데요?”
“작품을 돈으로 보는 사람들은 계속 있어.”
“하지만 벽에 걸린 저 작품은 아무래도 위작 같은 걸요.”
“그 유명한 작가 작품은 아니지만 위작은 아냐. 비슷한 화풍인거지.”
“그렇다면 저 가격은 이해가 안가는 걸요.”
“아니, 작품 가격은 부르는 게 값이야!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다 사게 되어 있어.”
어린 갤러리스트는 아무래도 328 갤러리 대표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갤러리 문을 열고 나왔다.
329 스트리트에 있는 갤러리 대표는 의욕이 없었다. 어린 갤러리스트가 들어오자마자 말했다.
“저녁이나 먹으러 갈래?”
아직 갤러리에 걸린 작품도 못 본 어린 갤러리스트는 대답했다.
“아직 작품도 못 봤는걸요?”
“작품을 뭐하러 봐. 나가서 저녁이나 먹자.”
“갤러리에서 어떤 전시를 하고 계시는대요?”
“그냥 옛날에 전시했던 작품 다시 꺼내서 걸어놓은거야. 볼 거 없으니 나가서 저녁이나 먹자.”
“다음 전시는?”
“예정에 없어.”
“갤러리잖아요. 왜 다음 전시가 없어요?”
“대관이 들어오면 하지.”
“전시 기획이나 작가 양성이나 발굴은요?”
“나도 어릴 때는 열정적으로 열심히 했어. 그래도 작품은 잘 안팔렸지. 전시가 끝나면 안팔린 작품은 내가 다 샀어. 그 때 사놓은 작품들을 한 점, 두 점 팔면서 사는거지. 지금은 편하게 살고 싶어.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저는 전시 기획도 하고, 작가들도 만나고 싶은걸요.”
“편하게 살아. 뭘 그렇게 열심히 하려고 해.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아니요. 저는… “
어린 갤러리스트는 계속 대꾸해봤자 저녁이나 먹으러 가게 될 것 같아서 갤러리 문을 열고 나왔다.
길 가장 끝에 있는 330 스트리트에 있는 갤러리는 작고 소박했다. 어린 갤러리스트가 들어서자 대표는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어서 와요. 전 지금 작가랑 차 한 잔 하고 있었어요. 같이 앉아요.”
처음으로 작가가 함께 와 있는 갤러리였다. 벽에는 유명 작가 작품이 아닌, 무명에 가까운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어린 갤러리스트에게 330 대표가 말했다.
“여기 있는 작품들은 우리가 함께 성장 중인 작가들의 작업이에요. 팔리는 게 전부는 아니죠. 물론 어렵긴 하지만…”
어린 갤러리스트가 물었다.
“그럼 어떻게 운영하세요?”
“음… 쉽진 않아요. 하지만 이 시장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요, 작품이 아니라 ‘작가’와 함께 성장해야 해요. 돈 되는 작품만 전시하면 갤러리는 오래 못 가요. 결국 남는 건 사람이고, 그 사람과 함께 만든 신뢰거든요.”
“그럼 컬렉터들은 뭐라 하시던가요?”
대표는 웃었다.
“눈 밝은 컬렉터들은 알아요. 갤러리는 ‘당장 값이 뛰는 작품’이 아니라 ‘시간과 노력이 쌓이는 작업’을 보는 곳이라는 걸.”
어린 갤러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갤러리에서 일하는 갤러리스트가 되고 싶어요. 저도 누군가와 함께 성장하고 싶어요.”
330 대표는 어린 갤러리스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린 갤러리스트는 다시 갤러리로 돌아오며 마음속에 그 말을 새겼다.
“미술 시장은 그림을 사고파는 곳이지만, 정말 중요한 건 사람이었어. 그림이 아니라 사람과 시간을 사야 하는 곳. 나는 그렇게, 오래도록 작가와 함께 늙어가는 갤러리스트가 되고 싶다.”
그리고 어린 갤러리스트는 알았다.
어른이 된다는 건, 긴 길을 함께 걸어줄 사람을 찾는 일이라는 걸.
그리고 나는 그의 앞길을 응원해주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2025.04.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April.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어린 갤러리스트>는 어린왕자를 샘플링한 픽션을 가장한 에세이이며, 본문에 나오는 인물은 특정 인물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이미지들은 생성형 AI를 통해 제작해보았습니다.
어린 갤러리스트
박준수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너무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화가 모자라고 부르던 베레모를 쓰고 계신 모습과, 보라매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나를 위해 공원을 산책하다 주워 오신 도토리를 갖고 놀라며 내 손에 쥐어 주시던 모습으로 어렴풋하게 기억날 뿐이다. 오히려 할아버지의 다락방에 있던 캔버스와 유화 물감이 잔뜩 묻은 붓, 나이프, 팔레트, 오일통, 그리고 집안 곳곳에 걸려있던 그림들은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래서 어렸을 때 할아버지 그림을 자주 따라 그렸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니 내가 그린 그림을 보고 미술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재능이 있다고 했다. 특별히 예술적 재능이 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작품을 많이 보고 자란 덕분에 또래 친구들보다 조금 더 인물이나 풍경을 잘 따라 그렸을 뿐이다. 하지만 막상 미대를 가니 어른들은 이렇게 그림을 그려서는 안된다며 차라리 이론을 공부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이런 연유로 나는 나이 스물 둘에 화가라는 멋진 직업을 포기해 버렸다. 입시 미술을 할 땐 칭찬받던 내 석고수채화들이 미대에서는 외면당했다. 그렇다면 왜 이걸로 시험을 봐서 뽑은거지?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더 이상 창작과 비평의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쉽게 붓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나는 다른 직업을 택해야 했기에 갤러리와 아트페어에서 일하는 법을 배웠다. 미술 시장 일은 세계 곳곳을 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기에, 이렇게 일생을 살아오는 동안 나는 수많은 진지한 사람들과 수많은 만남을 가졌다. 어른들 세계에서 많이 살았다는 얘기다. 나는 그들을 매우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었다. 어른들은 일에 지쳐 있거나, 욕심이 많거나, 겉과 속이 다르거나, 화가 나 있었다.
그러다보니 점점 나도 그런 어른이 되어 가는 것 같아 모든 것을 두고 머나먼 곳으로 떠났다. 나를 아무도 모르고 말도 통하지 않는 머나먼 땅에 도착했다. 그리고 며칠 후 아직 미술 시장을 잘 모르는 때 묻지 않고 순순한 어린 갤러리스트 (지망생)을 만났다.
나는 유치원생보다 못한 나의 어학 능력 향상을 위해 매일 비슷한 시간에 어린 갤러리스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루하루 나는 그가 일했던 갤러리들과, 그가 만났던 다양한 갤러리 대표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어린 갤러리스트가 일하는 갤러리는 B 에비뉴 612 스트리트에 있는 아주 작은 갤러리였다. 갤러리 대표는 늘 바빠 갤러리에 거의 오지 않았기에 그는 출근해서 혼자 모든 일을 했다. 몇 점 되지 않는 작품들의 먼지를 털고, 유리창을 닦았다. 바닥 청소에 옆 건물과 함께 쓰는 작은 화장실까지 청소하고 나면, 문 앞에 있는 작은 리셉션 데스크에 앉아 대표 앞으로 온 명품 백화점 카탈로그들를 정리해 폐지함에 넣는 일을 했다. 일주일에 한 두 번 오는 갤러리 대표는 항상 선생님처럼 가르치는 태도를 취하며 어린 갤러리스트에게 공손하고 단정해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 갤러리 대표는 항상 반말을 했는데, 공손하고 단정하게 말을 건네는 날은 이미 두달치 밀린 월급 이야기를 꺼낼 때였다. 어린 갤러리스트는 전시 기획을 하고 싶었다. 나중에는 자기 이름으로 갤러리를 내고도 싶어 밀린 월급에도 그만두지 못하고 다니고 있었다.
B 에비뉴 612 스트리트에는 다른 갤러리들도 있었다. 325, 326, 327, 328, 329, 330 갤러리였다. 그는 일자리도 찾고 가르침도 구할 겸 해서 다른 갤러리들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첫 번째 갤러리에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멜서스의 인구론을 열심히 읽는 325 대표가 있었다. 그는 어린 갤러리스트가 오는 것을 보자 큰소리로 외쳤다.
“내 말은 곧 법이니 무조건 해라!”
어린 갤러리스트는 의아스러워 반문했다.
“혹시 대표님께서 시키신 일이 틀린 일이면 어떻게 하죠?”
325 갤러리 대표는 다시 큰소리로 외쳤다.
“내 말이 틀릴리가 없으나, 틀리더라도 그 책임은 내가 진다. 토달지 말고 무조건 해라”
“하지만…”
“흠! 흠!”
자꾸 어린 갤러리스트가 반문을 하려하자, 325 갤러리 대표는 화난 기색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권위가 존중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반항은 용납될 수 없었다. 그는 절대 군주였다. 325 갤러리 대표는 거침없이 말했다.
“불복종은 용서치 않노라.”
어린 갤러리스트는 그러한 대단한 권력에 경탄했다.
“여기서 제가 할 일은 없군요. 다시 떠나겠어요!”
직원이 하나 생긴 것을 자랑스러워하던 대표가 답했다.
“떠나지 마라, 떠나지 마라. 내가 너를 팀장에 임명하겠노라!”
“무슨 팀장요?”
“음.. 전시팀장!”
“하지만 팀원이 없잖아요!”
“그건 모를 일이다. 팀원은 팀장이 뽑아야 할 일이다.”
“아무래도 떠나야 겠네요.”
“그건 안 돼.”
대표가 말했다.
어린 갤러리스트는 떠날 채비를 마쳤으나 대표를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다. 조용히 갤러리 문을 열고 나갔다.
326 갤러리에는 허영쟁이 대표가 있었다. 어린 갤러리스트를 보자마자 326 갤러리 대표는 멀리서부터 외쳤다.
“오! 우리 갤러리로 컬렉터가 오는구만!”
어린 갤러리스트는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컬렉터가 아니라 갤러리스트인걸요.”
“오! 그렇다면 우리 갤러리에서 일을 해. 우리 갤러리에서 일하면 나중에 큰 컬렉터가 될 수 있지.”
“월급을 많이 주시나요?”
“월급 대신 작품을 주겠네.”
“저는 작품 말고 생활비가 필요한걸요.”
“나중에 작품을 팔면 큰 돈을 벌텐데?”
“그게 언제인데요?”
“좋은 작품이라 언제라도 네가 돈이 필요할 때 팔면 돼.”
“그러면 대표님이 팔아서 월급으로 주시면 되잖아요?”
“후회할텐데, 정말 좋은 작품이야.”
“저는 당장 월급을 받고 싶어요.”
“미련하군. 큰 돈을 벌어서 컬렉터가 되고 싶지 않은가?”
어린 갤러리스트는 월급 대신 작품을 주겠다는 326 갤러리 대표에게 등을 돌리고 일어났다.
327 갤러리에는 주사가 있는 대표가 있었다. 이번 방문은 매우 짧았지만 충격은 엄청 났다.
빈 병 한 무더기와 가득한 병 무더기 앞에 말없이 앉아 있는 주정뱅이 대표는 덥썩 어린 갤러리스트의 손을 잡았다. 놀라서 손을 빼자 주정뱅이 대표는 술에 취한 부정확한 발음으로 외쳤다.
“너 이 판에서 일하고 싶지 않아!”
어린 갤러리스트는 대꾸도 안하고, 갤러리 문을 박차고 나왔다. 놀라서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주정뱅이의 협박에 겁이 나진 않았다.
328 갤러리에는 사업가 대표가 있었다. 어린 갤러리스트가 들어갔지만 328 대표는 하도 바빠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어린 갤러리스트가 그에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벽에 걸린 작품들이 어디서 본 듯 한 작품인대요.”
“오억이야!”
“하지만 유명한 그 작가 작품은 아닌 것 같은걸요.”
“너가 모든 작가를 다 알아! 오억이야!”
“뭐가 오억인데?”
사업가 대표가 고개를 들었다.
“내가 삼십 년을 이 판에서 굴렀는데, 방해받은 건 딱 세 번뿐이야. 첫 번째는 이십년 전, 대기업 블랙머니가 엮여 국세청 조사를 받을 때였지. 두 번째는 십년 전, 내가 판 작품이 위작 논란에 휩싸여 컬렉터들이 문 앞에서 농성할 때 였지. 세 번째가 바로 지금이야! 가만 있자. 그 사이에 옥션에 올라왔으니, 오억 일백만이던가…?”
“뭐가 그새 백만이 오른거에요?”
“원래 다 그런거야! 작품 가격은 주식과 부동산과 달리 계속 올라!”
“누가 사는데요?”
“작품을 돈으로 보는 사람들은 계속 있어.”
“하지만 벽에 걸린 저 작품은 아무래도 위작 같은 걸요.”
“그 유명한 작가 작품은 아니지만 위작은 아냐. 비슷한 화풍인거지.”
“그렇다면 저 가격은 이해가 안가는 걸요.”
“아니, 작품 가격은 부르는 게 값이야!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다 사게 되어 있어.”
어린 갤러리스트는 아무래도 328 갤러리 대표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갤러리 문을 열고 나왔다.
329 스트리트에 있는 갤러리 대표는 의욕이 없었다. 어린 갤러리스트가 들어오자마자 말했다.
“저녁이나 먹으러 갈래?”
아직 갤러리에 걸린 작품도 못 본 어린 갤러리스트는 대답했다.
“아직 작품도 못 봤는걸요?”
“작품을 뭐하러 봐. 나가서 저녁이나 먹자.”
“갤러리에서 어떤 전시를 하고 계시는대요?”
“그냥 옛날에 전시했던 작품 다시 꺼내서 걸어놓은거야. 볼 거 없으니 나가서 저녁이나 먹자.”
“다음 전시는?”
“예정에 없어.”
“갤러리잖아요. 왜 다음 전시가 없어요?”
“대관이 들어오면 하지.”
“전시 기획이나 작가 양성이나 발굴은요?”
“나도 어릴 때는 열정적으로 열심히 했어. 그래도 작품은 잘 안팔렸지. 전시가 끝나면 안팔린 작품은 내가 다 샀어. 그 때 사놓은 작품들을 한 점, 두 점 팔면서 사는거지. 지금은 편하게 살고 싶어.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저는 전시 기획도 하고, 작가들도 만나고 싶은걸요.”
“편하게 살아. 뭘 그렇게 열심히 하려고 해.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아니요. 저는… “
어린 갤러리스트는 계속 대꾸해봤자 저녁이나 먹으러 가게 될 것 같아서 갤러리 문을 열고 나왔다.
길 가장 끝에 있는 330 스트리트에 있는 갤러리는 작고 소박했다. 어린 갤러리스트가 들어서자 대표는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어서 와요. 전 지금 작가랑 차 한 잔 하고 있었어요. 같이 앉아요.”
처음으로 작가가 함께 와 있는 갤러리였다. 벽에는 유명 작가 작품이 아닌, 무명에 가까운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어린 갤러리스트에게 330 대표가 말했다.
“여기 있는 작품들은 우리가 함께 성장 중인 작가들의 작업이에요. 팔리는 게 전부는 아니죠. 물론 어렵긴 하지만…”
어린 갤러리스트가 물었다.
“그럼 어떻게 운영하세요?”
“음… 쉽진 않아요. 하지만 이 시장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요, 작품이 아니라 ‘작가’와 함께 성장해야 해요. 돈 되는 작품만 전시하면 갤러리는 오래 못 가요. 결국 남는 건 사람이고, 그 사람과 함께 만든 신뢰거든요.”
“그럼 컬렉터들은 뭐라 하시던가요?”
대표는 웃었다.
“눈 밝은 컬렉터들은 알아요. 갤러리는 ‘당장 값이 뛰는 작품’이 아니라 ‘시간과 노력이 쌓이는 작업’을 보는 곳이라는 걸.”
어린 갤러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갤러리에서 일하는 갤러리스트가 되고 싶어요. 저도 누군가와 함께 성장하고 싶어요.”
330 대표는 어린 갤러리스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린 갤러리스트는 다시 갤러리로 돌아오며 마음속에 그 말을 새겼다.
“미술 시장은 그림을 사고파는 곳이지만, 정말 중요한 건 사람이었어. 그림이 아니라 사람과 시간을 사야 하는 곳. 나는 그렇게, 오래도록 작가와 함께 늙어가는 갤러리스트가 되고 싶다.”
그리고 어린 갤러리스트는 알았다.
어른이 된다는 건, 긴 길을 함께 걸어줄 사람을 찾는 일이라는 걸.
그리고 나는 그의 앞길을 응원해주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2025.04.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April.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