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기획전 《찐사실주의》를 돌이켜보며
좋은 미술? 좋은 전시?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Younggi Kim (Deputy Director, OCI Museum of Art)
ID: José (2024. 11. 30.)
삐딱선을 타며 좌우로 반쯤 연 벽면의 전시 제목과 간단한 인트로. 소 닭 보듯 건성으로 훑으며 전시장에 들어선다. 밝고 따뜻한 조명, 바닥의 폭신한 카펫에 비스듬히 세워 둔 나무 액자, 모던한 탁자 위 화분, 태블릿을 올린 날씬한 협탁, 벽면 선반에 놓인 액자와 유리병, 널찍한 인조가죽 소파와 곳곳에 걸린 벽걸이 TV, 벽면의 족자… 높은 층고에 탁 트인 광장 같은 전시장은, 특정 작품보다, 널찍하고 모던한 인테리어와 곳곳에 내려앉은 포근함이 먼저 눈에 띤다.
잠깐, 저 멀리 창가의 나무 블라인드는 가만 보니 화면 속 영상이다. 탁자에 앉은 화분과, 선반을 수놓은 장식은 조각 그림 작업이다. 거실 한복판에 걸린 큼직한 TV 속에 ‘움짤’ 회화 작업이 꿈틀거린다. 자세히 보니 TV의 테두리 이곳 저곳에도 조그만 풍경 조각이 걸터앉았다. 곁에 내걸린 족자며, 협탁 위 태블릿 속에서 빙글빙글 도는 턴테이블 역시 작품이다. 멀리 천장에서 바닥에 끌리도록 늘어뜨린 커튼도, 기둥의 곡면을 따라 벽지처럼 두른 흰 천도 작품이다. 전시장에 멀뚱히 서 있는 키오스크 또한 양면으로 TV를 덧댄 영상 회화이다. 병풍도, 그 앞에 매달려 공중에서 빙빙 도는 양면 액자도, 거기 부딪히지 않게 고깔 대신 세워 둔 탁상 달력 속에도 죄다 작품이다. 거실의 소파엔 이미 누군가 편히 몸을 묻고 TV 속의 ‘움짤’ 작업을 힐끗 바라보다 이내 친구와 ‘톡’ 삼매경이다.
삼삼오오 모여 일정한 동선도 없이 저마다 전시장을 ‘배회’하는 관객들을 바라보자니 이게 전시인지 인테리어 쇼룸인지 애매하다. 기물 사이가 제법 널찍해 망정이지, 자칫하면 관객끼리 동선이 엉켜 관람이 매끄럽지 못했을 수도 있다.
참으로 그러하다. 전시이되 전시가 아니다. ‘관람’도 좋지만 ‘유람’하면 더 좋다. 오랜만에 얼굴 보는 누군가를 위한 약속 장소로, 혹은 땡볕을 피해 시간 때우기에 안성맞춤이다. 전시 내용? 알 게 뭔가. 뭔 말인지 도통 알 겨를 없는 현대미술은 원래 관심도 없고, 단지 이 큼직한 소파가 앉아 보면 의외로 안락할 뿐이다. 아, 저기 탁자 위 화분 그림은 우리 집에 갖다 둬도 참 좋겠다. 요란하게 하품을 조지며 두리번거리다 문득 들어오는 화면, 다리 떨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인물이 어딘가 날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알고 보니 요즘 대세 케이팝의 본고장, 머나먼 한국에서 촉망받는 작가들의 최신 작품이란다. 알겠고, 연달아 사흘을 삐대어도 아무도 뭐라는 사람이 없으니 내 집 거실처럼 편안하다. 너무 뻔뻔한가? 그런데 여기서 전문적으로 시간을 죽이다 보니 괜히 나도 문화인이 된 기분이다. 웃기지만 나쁘지 않다.
지난해 12월,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열린 해외기획전 《찐사실주의》가 막을 내렸다. 천신만고 끝에 연 전시였다. 시간적/금전적 제약, 제도상/절차상의 불합리, 물리적인 불확실성, 인력 문제 등 셀 수 없는 애로사항으로 수놓은 전시였다. 아무런 합의/협의 없이, 짧은 기간 내에, 지구 반대편에, 현지에 부끄럽지 않을 전시를 내는 건, 그냥 근처에 전시를 적당히 수출하는 것과는 아예 결이, 각이, 격이, 급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만큼 라포에 의지한 조율과 절충, 양해, 그리고 그에 화답하듯 때맞춰 터져 준 크고 작은 기적(?)들에 기대어 가까스로 실현했다. 그 질곡의 대서사를 꼬박 나열하다간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보다 몇 권 더 나올 낌새라 냉큼 단념하고, 기획 부분만 돌이켜본다.
동서남북 온갖 제약의 십자가에 예수처럼 꽁꽁 묶여 매달린 나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음을 깨닫고 순위를 정해 포기해 나갔다. 저장 강박 환자가 울며 짐을 버리듯, 빵빵(?)한 작가군을 버리고, 내심 점찍은 출품작을 버리고, 멋진 목공과 화려한 연출을 버렸다. 수묵과 한글과 도자를 버리고, 한국 현대 미술의 성장을 자랑하길 포기했다. 말하자면 규모, 짜임새, 한국적인 것, 효과와 성과를 버렸다.
그럼 무얼 챙겼을까. 작으면서 큰 규모를 궁리하고, 짜임새를 벗어난 짜임새를 취하고, 한국적인 것을 즉답적으로 재정의해 제시하고, 효과와 성과의 다른 측면을 살펴 설득력을 찾았다.
먼저 병풍, 족자, 캔버스 뭉치, 영상 작업, 벽면과 천장 바닥 전면 프로젝션과 효과음으로 채운 미디어 암실, 소품/가구와의 조화, 통유리 너머로 훤한 전시장 밖 인적과 풍경은 모두, 작으면서 큰 전시를 위한 형식 혹은 장치이다.
짜임새 면에선 기승전결을 지웠다. 전시 전경 스틸컷에 드러나는 또렷한 메인과 서브, 기승전결에도, 실제 관람 경험은 그에 연연할 필요가 없게끔 유도했다. 전시장 초입에서 멀찍이 훑을 때 눈길이 가는 무언가를 중요하게 생각해, 매달려 반짝이는 작은 액자나, 가방을 내려놓기 좋은 소파가 눈에 잘 띄게 했다. 그저 눈길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보면 그만. 한가한 주말, 남친도 약속도 없는 백조가, 풀메이크업에 무릎 모으고 눈에 핏대 세우며 열과 성을 다해 집구석에서 정좌하진 않을 것이다, 소파나 요가 매트에 드러누워 숨쉰 채 발견되면 다행이지. 그런 익숙한 바이브에 몸을 싣고, 탁자에 모자를 내던지며 의자에 반쯤 누워, 화면 속 창문 너머로 하염없이 멍 때리는 관람 경험이 곧 전시의 골자. 전시 제목도, 용어나 작품의 성향을 넘어, ‘전시 속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관객들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하고 무엇보다 틀림없는 사실’이란 맥락에서 "찐사실주의"라 명명했다.
“아직 한 발 남았다.” 내가 정의한, 현지에서 선보인 ‘한국적임’은 ‘(비록 한식은 아니나)마라탕후루’같은, 아직도 한 발 남은 혼종적 의외성이다. 기상천외한 감각과 결합한 사실성이 풍기는 의외성에 주목했다. 의외성은 한국 현대 미술 작가들의 감각이나 화법에서 등심이나 안심쯤 되는 부위이다. 권인경은 집의 집, 방 속의 밖, 화면에서 떼어낸 건물 등 단위와 차원을 트는 분리와 재결합을, 이승훈은 사실적이라 더욱 기이한 표정과 동작, 사물의 앞면과 뒷면이 함께 꿈틀대는 움짤 같은 화면을 주요 화법으로 삼는다. 그들이 묘하게 섞여 전반적으로 애틋하며 유쾌한 단짠의 맛과, 의외로 그럴싸한 시각적 조화를 제시한다. 또한 뭔가 이미 결합이 듬뿍 묻은 동양화와 디지털 페인팅의, 어딘가 이질적인데 포용해야 할 것 같은 메타 결합도, 이 별난 감각의 시각화에 한몫한다.
‘효과와 성과의 다른 측면’은 할 말이 많은데, 평소 전시 지론을 일부 실현했다는 의의가 크다. 현대인은 바쁘고, 참을성 없고, 꾸준히 게으르며, 여전히 어리석고, 겁에 질려 있다. 그야말로 현대인의 특징이자 자격. 관심과 애정을 품고, 찾고 공부하고, 연구하고 생각하는 ‘준비된 관객’은, 키 크고 돈 많고 성격 좋고 잘생긴 순애보 찐따 남친보다 희소하다. 또한 그들 눈높이에 맞추면 대다수 관객의 시기와 외면이 기다린다. 당연하다. 볼 거, 놀 거, 할 거 많은 세상이다. 미술은 더 이상 마술적이지 않다. 준비된 관객이 외려 더 기이한 판국. 그래서 울타리를, 진입 장벽을 낮춰야 한다. 쉽고 편한 걸 넘어, ‘손 안 대고 코 풀기’의 (뻔뻔함보다)매력에 주목할 때이다. 힘쓰고 애쓰고 용쓸 기대를 말자. 사전 지식과 소양, 진지한 태도와 각오, 체력과 집중력이 필요 없는 전시를 추구한다. 어떤 면에서 전시는 이제 우연한 재미(serendipity)이다. 아무 생각 없이 물만 먹고 가려던 옹달샘에서 엉겁결에 세수와 양치는 물론 온천욕, 전신 마사지까지 풀코스로 누리는, 운수 대통 새벽 토끼처럼 말이다. ‘편안한 횡재’야말로 내 전시의 일관적 모토이다.
혹자는 수준이나 깊이를 고민한다. 그런데 담론은, 잘 갖춘 연구에 힘입어 용어화/공식화/체계화하지만, 대개 그 탄생은 단상의 재조명이다. 버린 생각끼리 부싯돌처럼 서로 부딪어 그 접점에서 불똥 같은 쓸모를 발견하는 것. 그래서 국자로 가마솥 거품 걷듯, 관객의 겁을 걷고 생각을 끓게 해야 한다. 또한 인문학적 연구와 기획, 감상의 공통점은, 단서 사이의 구멍과 틈을 논리와 상상력으로 채워 납득할 곡률을 만드는 놀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망상이야말로 훌륭한 감상”이라 크게 새긴 면죄부를, 관객에게 다가가 적극적으로, 한 다발 헤프게 쥐여 주는 건 기획자의 중요한 본분이다. 그럼 그 뒤엔? 알아서 따라온다. 깊이는 수칙이 아니라 결과이다. 다짜고짜 한 쟁반에 모조리 쏟아내면 얕게 퍼진다. 통찰은 감기와 같아서, 뒤끝처럼 별안간, 갑자기, 느닷없이, 뜬금, 문득 어느 날, 종종 온다. 감상이 쌓이고, 통찰이 익고, 두고두고 입방아를 찧어야 깊다. 쌓인 눈을 보며 마주 앉아 고기를 먹는 갬성 넘치는 장면을 떠올리자. 전시의 깊이란, 전문가의 자평이 아니라 뭇사람의 생각의 적설(積雪)과 회자(膾炙)이다. 그래서, 은근히 끌리고, 쉬워 보이고, 진입 장벽이 낮고, 감상에 힘이 들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몰입하고, 술자리에서 괜히 생각나고, 어느 날 문득 깨닫고 유레카 외치고, 다시 보고 싶은 전시를 추구했다.
최근 인터뷰를 했다. 좋은 미술이 무엇인지 질문받았다. 아마 누구도 즉답하지 못할 것이다. 막막함에 범위를 좀 줄여 달라 부탁했다. 좋은 전시란? 그것도 어지간히 넓어야 말이지. 모든 전시를 아우르는 기준, 그런 건 당연히 없다. 확실한 하나는, 각자 달라야 한다. 겹치지 않게. 미술씬의 손꼽는 가치 ‘다양성’. 좀 더 폭넓은 볼거리도, 다름에 대한 존중도 좋지만, 그거 아니어도 그 자체가 곧 ‘미술다움’이다. 행여 누군가는 ‘보고 싶지 않은 전시, 불쾌한 전시, 도무지 남는 게 없는 전시, 제대로 시간 낭비인 전시가 좋은 전시’라고 진심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전시이든, 그 대척점의 전시이든, 미술씬 전체로 놓고 보면 두루 섞인 자체가 복이다. 열 폭 풍경도, 스무 장 종이도, 서른 자루 크레파스도 다 흰색이면 그것만큼 끔찍한 게 있을까.
이 전시가 내 지론과 기준을 제대로 현현한, 진실로 좋은 전시인가는 무턱대고 자신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마음가짐을 잊지 않으리 거듭 다짐하며 매 순간 임한 전시임에는 분명하다. 어제보다 눈곱만큼 나은 오늘이면 족하다. 참, 그것 또한 내 지론이다.
2025.04.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April.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해외기획전 《찐사실주의》를 돌이켜보며
좋은 미술? 좋은 전시?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Younggi Kim (Deputy Director, OCI Museum of Art)
ID: José (2024. 11. 30.)
삐딱선을 타며 좌우로 반쯤 연 벽면의 전시 제목과 간단한 인트로. 소 닭 보듯 건성으로 훑으며 전시장에 들어선다. 밝고 따뜻한 조명, 바닥의 폭신한 카펫에 비스듬히 세워 둔 나무 액자, 모던한 탁자 위 화분, 태블릿을 올린 날씬한 협탁, 벽면 선반에 놓인 액자와 유리병, 널찍한 인조가죽 소파와 곳곳에 걸린 벽걸이 TV, 벽면의 족자… 높은 층고에 탁 트인 광장 같은 전시장은, 특정 작품보다, 널찍하고 모던한 인테리어와 곳곳에 내려앉은 포근함이 먼저 눈에 띤다.
잠깐, 저 멀리 창가의 나무 블라인드는 가만 보니 화면 속 영상이다. 탁자에 앉은 화분과, 선반을 수놓은 장식은 조각 그림 작업이다. 거실 한복판에 걸린 큼직한 TV 속에 ‘움짤’ 회화 작업이 꿈틀거린다. 자세히 보니 TV의 테두리 이곳 저곳에도 조그만 풍경 조각이 걸터앉았다. 곁에 내걸린 족자며, 협탁 위 태블릿 속에서 빙글빙글 도는 턴테이블 역시 작품이다. 멀리 천장에서 바닥에 끌리도록 늘어뜨린 커튼도, 기둥의 곡면을 따라 벽지처럼 두른 흰 천도 작품이다. 전시장에 멀뚱히 서 있는 키오스크 또한 양면으로 TV를 덧댄 영상 회화이다. 병풍도, 그 앞에 매달려 공중에서 빙빙 도는 양면 액자도, 거기 부딪히지 않게 고깔 대신 세워 둔 탁상 달력 속에도 죄다 작품이다. 거실의 소파엔 이미 누군가 편히 몸을 묻고 TV 속의 ‘움짤’ 작업을 힐끗 바라보다 이내 친구와 ‘톡’ 삼매경이다.
삼삼오오 모여 일정한 동선도 없이 저마다 전시장을 ‘배회’하는 관객들을 바라보자니 이게 전시인지 인테리어 쇼룸인지 애매하다. 기물 사이가 제법 널찍해 망정이지, 자칫하면 관객끼리 동선이 엉켜 관람이 매끄럽지 못했을 수도 있다.
참으로 그러하다. 전시이되 전시가 아니다. ‘관람’도 좋지만 ‘유람’하면 더 좋다. 오랜만에 얼굴 보는 누군가를 위한 약속 장소로, 혹은 땡볕을 피해 시간 때우기에 안성맞춤이다. 전시 내용? 알 게 뭔가. 뭔 말인지 도통 알 겨를 없는 현대미술은 원래 관심도 없고, 단지 이 큼직한 소파가 앉아 보면 의외로 안락할 뿐이다. 아, 저기 탁자 위 화분 그림은 우리 집에 갖다 둬도 참 좋겠다. 요란하게 하품을 조지며 두리번거리다 문득 들어오는 화면, 다리 떨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인물이 어딘가 날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알고 보니 요즘 대세 케이팝의 본고장, 머나먼 한국에서 촉망받는 작가들의 최신 작품이란다. 알겠고, 연달아 사흘을 삐대어도 아무도 뭐라는 사람이 없으니 내 집 거실처럼 편안하다. 너무 뻔뻔한가? 그런데 여기서 전문적으로 시간을 죽이다 보니 괜히 나도 문화인이 된 기분이다. 웃기지만 나쁘지 않다.
지난해 12월,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열린 해외기획전 《찐사실주의》가 막을 내렸다. 천신만고 끝에 연 전시였다. 시간적/금전적 제약, 제도상/절차상의 불합리, 물리적인 불확실성, 인력 문제 등 셀 수 없는 애로사항으로 수놓은 전시였다. 아무런 합의/협의 없이, 짧은 기간 내에, 지구 반대편에, 현지에 부끄럽지 않을 전시를 내는 건, 그냥 근처에 전시를 적당히 수출하는 것과는 아예 결이, 각이, 격이, 급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만큼 라포에 의지한 조율과 절충, 양해, 그리고 그에 화답하듯 때맞춰 터져 준 크고 작은 기적(?)들에 기대어 가까스로 실현했다. 그 질곡의 대서사를 꼬박 나열하다간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보다 몇 권 더 나올 낌새라 냉큼 단념하고, 기획 부분만 돌이켜본다.
동서남북 온갖 제약의 십자가에 예수처럼 꽁꽁 묶여 매달린 나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음을 깨닫고 순위를 정해 포기해 나갔다. 저장 강박 환자가 울며 짐을 버리듯, 빵빵(?)한 작가군을 버리고, 내심 점찍은 출품작을 버리고, 멋진 목공과 화려한 연출을 버렸다. 수묵과 한글과 도자를 버리고, 한국 현대 미술의 성장을 자랑하길 포기했다. 말하자면 규모, 짜임새, 한국적인 것, 효과와 성과를 버렸다.
그럼 무얼 챙겼을까. 작으면서 큰 규모를 궁리하고, 짜임새를 벗어난 짜임새를 취하고, 한국적인 것을 즉답적으로 재정의해 제시하고, 효과와 성과의 다른 측면을 살펴 설득력을 찾았다.
먼저 병풍, 족자, 캔버스 뭉치, 영상 작업, 벽면과 천장 바닥 전면 프로젝션과 효과음으로 채운 미디어 암실, 소품/가구와의 조화, 통유리 너머로 훤한 전시장 밖 인적과 풍경은 모두, 작으면서 큰 전시를 위한 형식 혹은 장치이다.
짜임새 면에선 기승전결을 지웠다. 전시 전경 스틸컷에 드러나는 또렷한 메인과 서브, 기승전결에도, 실제 관람 경험은 그에 연연할 필요가 없게끔 유도했다. 전시장 초입에서 멀찍이 훑을 때 눈길이 가는 무언가를 중요하게 생각해, 매달려 반짝이는 작은 액자나, 가방을 내려놓기 좋은 소파가 눈에 잘 띄게 했다. 그저 눈길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보면 그만. 한가한 주말, 남친도 약속도 없는 백조가, 풀메이크업에 무릎 모으고 눈에 핏대 세우며 열과 성을 다해 집구석에서 정좌하진 않을 것이다, 소파나 요가 매트에 드러누워 숨쉰 채 발견되면 다행이지. 그런 익숙한 바이브에 몸을 싣고, 탁자에 모자를 내던지며 의자에 반쯤 누워, 화면 속 창문 너머로 하염없이 멍 때리는 관람 경험이 곧 전시의 골자. 전시 제목도, 용어나 작품의 성향을 넘어, ‘전시 속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관객들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하고 무엇보다 틀림없는 사실’이란 맥락에서 "찐사실주의"라 명명했다.
“아직 한 발 남았다.” 내가 정의한, 현지에서 선보인 ‘한국적임’은 ‘(비록 한식은 아니나)마라탕후루’같은, 아직도 한 발 남은 혼종적 의외성이다. 기상천외한 감각과 결합한 사실성이 풍기는 의외성에 주목했다. 의외성은 한국 현대 미술 작가들의 감각이나 화법에서 등심이나 안심쯤 되는 부위이다. 권인경은 집의 집, 방 속의 밖, 화면에서 떼어낸 건물 등 단위와 차원을 트는 분리와 재결합을, 이승훈은 사실적이라 더욱 기이한 표정과 동작, 사물의 앞면과 뒷면이 함께 꿈틀대는 움짤 같은 화면을 주요 화법으로 삼는다. 그들이 묘하게 섞여 전반적으로 애틋하며 유쾌한 단짠의 맛과, 의외로 그럴싸한 시각적 조화를 제시한다. 또한 뭔가 이미 결합이 듬뿍 묻은 동양화와 디지털 페인팅의, 어딘가 이질적인데 포용해야 할 것 같은 메타 결합도, 이 별난 감각의 시각화에 한몫한다.
‘효과와 성과의 다른 측면’은 할 말이 많은데, 평소 전시 지론을 일부 실현했다는 의의가 크다. 현대인은 바쁘고, 참을성 없고, 꾸준히 게으르며, 여전히 어리석고, 겁에 질려 있다. 그야말로 현대인의 특징이자 자격. 관심과 애정을 품고, 찾고 공부하고, 연구하고 생각하는 ‘준비된 관객’은, 키 크고 돈 많고 성격 좋고 잘생긴 순애보 찐따 남친보다 희소하다. 또한 그들 눈높이에 맞추면 대다수 관객의 시기와 외면이 기다린다. 당연하다. 볼 거, 놀 거, 할 거 많은 세상이다. 미술은 더 이상 마술적이지 않다. 준비된 관객이 외려 더 기이한 판국. 그래서 울타리를, 진입 장벽을 낮춰야 한다. 쉽고 편한 걸 넘어, ‘손 안 대고 코 풀기’의 (뻔뻔함보다)매력에 주목할 때이다. 힘쓰고 애쓰고 용쓸 기대를 말자. 사전 지식과 소양, 진지한 태도와 각오, 체력과 집중력이 필요 없는 전시를 추구한다. 어떤 면에서 전시는 이제 우연한 재미(serendipity)이다. 아무 생각 없이 물만 먹고 가려던 옹달샘에서 엉겁결에 세수와 양치는 물론 온천욕, 전신 마사지까지 풀코스로 누리는, 운수 대통 새벽 토끼처럼 말이다. ‘편안한 횡재’야말로 내 전시의 일관적 모토이다.
혹자는 수준이나 깊이를 고민한다. 그런데 담론은, 잘 갖춘 연구에 힘입어 용어화/공식화/체계화하지만, 대개 그 탄생은 단상의 재조명이다. 버린 생각끼리 부싯돌처럼 서로 부딪어 그 접점에서 불똥 같은 쓸모를 발견하는 것. 그래서 국자로 가마솥 거품 걷듯, 관객의 겁을 걷고 생각을 끓게 해야 한다. 또한 인문학적 연구와 기획, 감상의 공통점은, 단서 사이의 구멍과 틈을 논리와 상상력으로 채워 납득할 곡률을 만드는 놀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망상이야말로 훌륭한 감상”이라 크게 새긴 면죄부를, 관객에게 다가가 적극적으로, 한 다발 헤프게 쥐여 주는 건 기획자의 중요한 본분이다. 그럼 그 뒤엔? 알아서 따라온다. 깊이는 수칙이 아니라 결과이다. 다짜고짜 한 쟁반에 모조리 쏟아내면 얕게 퍼진다. 통찰은 감기와 같아서, 뒤끝처럼 별안간, 갑자기, 느닷없이, 뜬금, 문득 어느 날, 종종 온다. 감상이 쌓이고, 통찰이 익고, 두고두고 입방아를 찧어야 깊다. 쌓인 눈을 보며 마주 앉아 고기를 먹는 갬성 넘치는 장면을 떠올리자. 전시의 깊이란, 전문가의 자평이 아니라 뭇사람의 생각의 적설(積雪)과 회자(膾炙)이다. 그래서, 은근히 끌리고, 쉬워 보이고, 진입 장벽이 낮고, 감상에 힘이 들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몰입하고, 술자리에서 괜히 생각나고, 어느 날 문득 깨닫고 유레카 외치고, 다시 보고 싶은 전시를 추구했다.
최근 인터뷰를 했다. 좋은 미술이 무엇인지 질문받았다. 아마 누구도 즉답하지 못할 것이다. 막막함에 범위를 좀 줄여 달라 부탁했다. 좋은 전시란? 그것도 어지간히 넓어야 말이지. 모든 전시를 아우르는 기준, 그런 건 당연히 없다. 확실한 하나는, 각자 달라야 한다. 겹치지 않게. 미술씬의 손꼽는 가치 ‘다양성’. 좀 더 폭넓은 볼거리도, 다름에 대한 존중도 좋지만, 그거 아니어도 그 자체가 곧 ‘미술다움’이다. 행여 누군가는 ‘보고 싶지 않은 전시, 불쾌한 전시, 도무지 남는 게 없는 전시, 제대로 시간 낭비인 전시가 좋은 전시’라고 진심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전시이든, 그 대척점의 전시이든, 미술씬 전체로 놓고 보면 두루 섞인 자체가 복이다. 열 폭 풍경도, 스무 장 종이도, 서른 자루 크레파스도 다 흰색이면 그것만큼 끔찍한 게 있을까.
이 전시가 내 지론과 기준을 제대로 현현한, 진실로 좋은 전시인가는 무턱대고 자신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마음가짐을 잊지 않으리 거듭 다짐하며 매 순간 임한 전시임에는 분명하다. 어제보다 눈곱만큼 나은 오늘이면 족하다. 참, 그것 또한 내 지론이다.
2025.04.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April. 2025.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