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씬 썰

기획자나 평론가의 중요한 외부 활동 가운데 심사/심의가 있다. 성격과 무관하게 새삼 책임감이 밀려오는 시간이다. 나야 어떻든, 지원자는 건곤일척 사생결단으로 갈고 다듬어 심사장에 섰을 테니. 그래서, 본격적인 심사에 임하기에 앞서, 대개 회피/제척 제도가 있다. 심사는 대개 초반에 가장 신중하다. 그 탓에 제척 요구서를 구겨 쥔 채, 종종 생각에 잠긴다. ‘이 사람과 나는 관계가 있는가? 있다면 어떤 관계인가? 그것은 이해관계인가 아닌가?’

해당 제도는 절차적 공정성과 합리성을 담보하고, 문제의 소지를 최소화하려는 취지이다. 공공영역의 사업에선 당연히 좀 더 민감하다. 따라서 철학적인 논의가 아니라, 최소한의 보험 차원에서 보수적으로 접근해 마땅하다. 이러한 안전장치의 당위성에 나는 이견이 없다. 설령 실질 효용이 크지 않아도, 도덕적 경계를 공언하는 일종의 상징적 이정표로서 가치가 있다. 절차와 형식을 중요히 여기지 않는 편이지만, 이야말로 ‘절차’가 지닌 중요한 가치라 생각한다.

다만 심사를 마치고도, 감히 누군가의 운명에 갈림길을 놓는 외부 인사로서, 현장에서 어떻게 판단하고 대처하는지 종종 되짚곤 한다. 꼭 혈연이 아니어도, ‘나와 관계 있는 작가’의 범주는 다양하다. 내가 전시를 맡은 작가, 글을 준 적이 있는 작가, 섭외에 내가 결정적 역할을 한 작가, 사업 지원을 권한 작가, 친한 작가의 베프 작가, 언젠가 사석에서 친해진 작가, 출신 학교 선후배, 재직한 학교의 제자들, 자문/협력 중인 기관/단체 소속의 작가, 내가 소장한 작품의 작가…

그들 모두가 잘 되길 진심으로 그리고 줄곧 바라지만, 채점하는 내 펜 끝은 말과 다른 쪽으로 움직이곤 한다. 돌이켜보면 단 한 번도 없는 듯싶다. 짐짓 고평가하여 ‘덤’을 준 적이. 포청천이라도 빙의해 유달리 공명정대하거나 스스로에게 엄격해서가 아니다. 도리, 도의, 도덕 또한 인류의 행복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며, 진실로 훌륭한 것들은 비장함 바깥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때문에 오히려 어떻게든 심각하지 않으려 애쓴다. 그럼 이 점수는 대체 무슨 생각인가?

‘굳이 내가 안 밀어줘도 통과할 거야, 뛰어난 작가니까.’

‘실물을 봐서 나는 알아, 이 작업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그러나 평가는 제출한 자료 안에서만 해야 바람직해.’

‘이 작가를 밀면 결과적으로, 나는 물론이고 심지어, 평가에 참여한 다른 분들의 신뢰도까지 깎을 위험이 있어’

문장으로 정리한 적은 처음이고, 저리 심각하게 기치를 내세워 임하는 것도 아니지만, 얼추 위와 같은 논리를 일삼았으리라.

‘팔은 안으로 굽는다’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회피/제척하는 거고. 말하자면 ‘굽지 않으면 성공’인 셈. 그런데 내 팔뚝은 서커스 하듯 종종 바깥으로 굽곤 한다. 오히려 점수를 짜게 주는 것. 채점표를 내기에 앞서 쭉 훑다 보면, 곳곳 억누른 부분 점수가 시선을 괴롭힌다. “이 90점은 ‘딱 90점’이 아니다. 100점 받을 작가인데, ‘제풀에 삼가 90점’.” 참 아이러니하다. ‘그럭저럭이면 안심, 도드라지면 오히려 걱정’이라니. 덕분에 쓸데없이 좀 더 떳떳할 때가 있다. 벼랑에서 밀고 매 맞히며 키운 자식 보듯 말이다. 아, 요즘은 학대인가 이러면. 그래 봐야 심사 위원 하나 몫의 부분 점수 한두 칸 차이이지만, 본의 아니게 종종 저지르는 역차별에도, 꿋꿋이 선정되는 ‘내 작가’들을 바라볼 땐 송구와 경외가 교차한다.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안 굽는 게 가장 좋다. 다만, 꼭 굽어야겠다면 바깥으로 굽는 게 낫다. 차라리 그런 이가 파다하면, 불공정은 몰라도 부패는 피하니까.

2026.10.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October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