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앞서 간다.

열 걸음 정도 앞서다 보면 아이와 적당한 거리가 생긴다. 그리고 작품을 약 5초~10초 정도 감상한 후, 아무 생각 없이 다음 작품으로 넘어간다. 한두 명 정도 있는 전시장에선 아이의 목소리는 흐름을 타고 공명한다. 물론 전시장 내에선 소음이다. 내 귀에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면 한번 뒤돌아본다. 돌아보니 헤드폰을 끼고 작품을 감상한다.

아이와 함께 자주 미술관을 찾는다. 아마도 그냥 나에게 직업적으로 친숙한 공간이 되었기 때문에 아이와 뭐를 해야 할지 망설여질 땐, 무조건 전시장을 찾는다. 물론 집에서 가깝고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기 쉬운 곳을 간다. 일을 할 때나 결혼 전에는 보고 싶은 전시와 작가를 선별해 찾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된 지금은 보고 싶은 전시나 때로는 한 번쯤 참여해 보고 싶은 많은 행사에 갈 수가 없다. 그렇다고 전시를 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이와 함께 미술관에 가는 일이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다만 전시를 보는 방식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전시장을 한 바퀴 돌아본 뒤 다시 관심 있는 작품 앞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전시의 구성과 작품 사이의 관계를 살피고, 작가가 어떤 재료를 사용했는지, 왜 이 작품을 이 자리에 놓았는지 생각했다. 때로는 전시를 다 보고도 한참을 앉아 있었다. 지금은 그럴 만한 시간이 없다. 아이가 어디쯤 있는지, 작품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는지, 다른 관람객에게 방해가 되지는 않는지를 먼저 살핀다.

작품을 보다가도 자꾸 뒤를 돌아본다. 그러다 보면 조금 전까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잊어버린다. 다시 작품 앞으로 돌아가지만 이미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해 있고 온 신경은 아이에게 가 있다. 전시를 이루는 여러 작품이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기 전에 그 흐름이 끊어진다. 한 전시를 보고 나왔는데도 정작 무슨 전시를 봤는지 설명할 수 없다. 오늘의 장면이 끝났다. 이제 집에 갈 시간이다. (으흠)

이런 경험은 나를 조금 당황스럽게 한다. 오랫동안 전시를 기획하고 예술에 관한 글을 써왔다. 전시를 읽으려는 노력은 내게 익숙한 일이었다. 작품의 형식과 내용, 전시를 둘러싼 맥락을 이해하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 내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작품보다 아이의 움직임을 먼저 읽는다. 작품의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에 아이가 어디로 갈지 예상하고, 다음 공간에 무엇이 있는지 살핀다. 어느 순간 나는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이기보단 아이를 따라다니는 보호자가 되었다. 그냥 작품을 원래 잘 이해하지 못했던, 멀어진 마음으로 바라본다. 그렇다고 아이의 시선을 따라가는 일이 언제나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아이는 작품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고, 배가 고프다고 하고, 언제 집에 가느냐고 묻는다. (피식) 당연한 일이다.

아이와 함께 퀸즈 뮤지엄에서 소니아 보이스의 《Demonstrate》를 관람했다. 전시장은 여러 사람의 목소리와 움직임으로 채워져 있었다. 영상 속 사람들은 노래하고, 말하고, 몸을 움직인다. 보이스는 이처럼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리와 행위를 하나의 작업으로 구성한다. 여기에서 목소리는 단순히 개인의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공동의 경험을 만들어가는 방식이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그 목소리들을 충분히 듣지 못했다. 아니 듣지 않았다.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사이로 아이의 목소리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헤드폰을 끼고 작품을 감상하는 아이를 뒤돌아보면서도 내가 보고 있던 영상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생각했다. 다시 화면을 바라보았을 때는 이미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 있었다. 보이스의 작업에서 여러 사람의 목소리는 서로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장면을 만들어낸다. 반면 나에게 아이의 목소리는 종종 감상을 중단시키는 신호가 된다. 누군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 그 소리에 반응하고, 다시 눈앞의 작품으로 돌아오는 일. 전시장 안에서 나는 이 일을 반복한다. 결국 내가 듣는 소리는 작품 속 목소리와 아이의 목소리,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들이 뒤섞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보이스가 예술을 반드시 한 사람의 완결된 표현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작업은 다른 사람들의 참여와 즉흥적인 반응을 통해 형성된다. 작품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예술가가 미리 정해 놓은 결과를 재현하기보다 각자의 목소리와 행동으로 작업에 개입한다. 나는 그 장면들을 보면서 정작 내 관람에는 다른 사람의 개입을 허용하기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또다시 느낀다. 물론 이것을 두고 아이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하나의 예술적 경험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전시를 기획하고 예술에 관한 글을 쓴다. 동시에 아이를 돌보고 가르치는 일을 한다. 이 일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지만 언제나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경험이 나를 더 좋은 기획자나 글 쓰는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해졌고, 읽지 못한 글과 보지 못한 전시가 쌓인다. 때로는 예술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전만큼 따라가지 못한다는 조급함도 느낀다. 이제 그 조급함이 아쉽지가 않다.

전혀 아쉽지 않은 내가 그 안에서 웃는다. 행복한가? 그렇다. 바라보는 나는 이토록 행복하고.

전시장에서 아이보다 열 걸음 앞서 걷다가 다시 뒤를 돌아본다.

전시를 다 보고 나오면 아이에게 무엇이 가장 좋았는지 묻는다. 아이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작품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나는 그 작품이 어느 전시장에 있었는지 잠시 생각한다. 분명 같은 전시를 보고 나왔는데, 우리가 기억하는 장면은 서로 다르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날 전시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집에 돌아가면 전시 제목부터 다시 찾아봐야겠다. – 참고로, 전시 제목을 퀸즈 뮤지엄에서 찾아보고 앞 글을 쓴 것임 –

아이와 찾은 미술관들의 흔적을 담아보았다. (최근 순서대로)

2026.1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November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