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옵세션〉(2025)에서 여자 주인공이 사랑(love)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 하니 남자 주인공이 로맨스 소설을 쓰고 싶은 거냐고 되묻는다. 니키(여자 주인공)가 쓰고 싶은 사랑은 그보다 훨씬 인류애적인 것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구에게 자연 같은, 엄마와 아이 사이의, 무엇이든 하게 하는 용기 같은 입체적이고 풍요로운 사랑. 그런 커다란 사랑을 꿈꾸고 있는데, 원하지도 않는 관계에 착취당하는 것보다 큰 비극이 있을까. 니키가 원한 글은 연애의 성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세계를 포용하는 용기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 같다.
『별의 시간』(1977)에서 주인공 마카베아는 사랑을 ‘나는-뭔지-모르겠는-것’이라고 부른다1. 하지만 별 이유 없이도 행복에 잠겨 가만히 서서 미소를 짓고, 식은 커피를 마시는 것에서도 기쁨을 찾는 마카베아가 사랑을 모를 리가 없다. 마카베아가 끝내 갖지 못한 것은 로맨스다.
바르트가 남긴 노트를 읽다 보면 꽤 높은 빈도로 모든 질문을 사랑으로 몰고 간다. 어떤 노트2에서 괴로운 고민을 하다가 뜬금없이 “아마 이건 사랑이 아닐까?”라고 사유하는 걸 보고 흥미를 느꼈다. 그는 사랑에 대한 말조각을 모은 『사랑의 단상』도 집필했다. 왜 자꾸 사랑일까? 바르트가 질문하는 사랑은 성애적인 것보단 복잡하고 깊은 무언가이다. 부재할 때 진해지고, 무엇이든 연결 짓고, 애도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바르트가 말한 사랑이 니키가 쓰고 싶어 했던 사랑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2.
어느 날 친구가 우리 하게 아프다고 하는 말을 못 알아들었는데, 난감한 표정으로 어떤 느낌인지 한참을 설명했다. 뻐근한 것도, 시린 것도, 결리거나 아리는 것도 아니고, 그런 느낌들보다 더 안쪽에서 올라오는 아픔이라고 했다. 당시엔 결국 못 알아들었었는데, 평소 내가 날개뼈 쪽에 느끼는 아픔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 이후로도 우리 하게 아픈 게 뭔지 명확하게 알고 싶어져서 경상도 방언을 쓰는 사람들한테 우리 한 게 뭔지 물어봤는데 다들 조금씩 다른 대답을 했다. 물론 기본적으로 불쾌감이 느껴지는 깊고 은근한 통증을 말하는데, 정도나 아픈 위치가 서로 달랐다.
종종 뭉근하다는 단어가 우리 하다는 단어와 비슷한 모양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회화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몸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시각화한다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자꾸만 우리 하다는 단어가 떠오른다. 여름이 되면 마음 한구석이 계속 우리 하다. 비가 오면 관절이 우리 하다. 우리 하게 느껴지는 무언가를 필치를 통해 꺼내본다. 등등.
3.
배트맨과 같은 히어로 영화를 보다 보면 자주 등장하는 대사가 있다. ‘I’m Vengeance’라는 대사인데, 한국어로는 흔히 ‘나는 복수다’라고 번역된다. 맞는 번역인데, 매번 어색했다. 더 나은 단어가 뭘까 생각해 봐도 복수 말고는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vengeance는 revenge보다 묵직하고 진중한 단어이고, 앙갚음보단 사회적 정의나 도덕적 응징에 가까운 의미를 수반한다. 개인적 감정과 견해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응징을 행하는 이가 반드시 정의의 사도인 것도 아니다. 결국은 복수가 맞지만, 복수라고 하기엔 누락되는 미묘한 태도들이 아쉽다. 한편 vengeance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영화 제목이 있다. 〈친절한 금자씨〉(2005)의 영문 제목은 Lady Vengeance다. 금자가 행하는 복수는 개인적인 앙갚음이기도 하지만, 아이를 잃은 부모들의 슬픔과 분노를 대표하고 금수 같은 유괴범을 단죄한다는 태도도 포함한다. 한글 제목인 친절한 금자씨가 vengeance의 기능을 잘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한글 제목이 먼저였겠지만.
4.
이 글이 발행된 시점에는 마무리되었겠지만, 10월은 기금 신청 기간이었다.
전시를 왜 해야 하는지, 지금 이 상황에서 꼭 해야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계속 되묻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지나치게 매끈한 설정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기획과 관련된 글을 쓰다 보면 ‘서사에 개입할 여지’라는 말을 습관처럼 사용하게 된다. 실제로 열린 구조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그 말이 머쓱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정말로 관객에게 여지를 남겨두고 있었던 걸까? 방향을 설정해둔 채, 그렇게 읽히기만을 유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혹은 존재하지 않는 서사를 있는 것처럼 강요하지는 않았나.
(위 노트는 과거에 적은 것이고, 지금은 여지와 서사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줄이고 있다.)
5.
“나는-뭔지-모르겠는-것”이 원문으로는 “não-
어디에도 부치지 못한 서로 붙지 않는 말 조각들을 꺼내본다. 언젠가 한 덩어리로 이어질 수 있을까?
2026.1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November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