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의 근사한 디너나 시끌벅적한 오프닝을 보이콧하고 안 간 지 좀 되었다. 그렇다고 전시를 안 보러 다니는 건 아니고, 오프닝 다음 날이나 조용한 평일 오전에 스윽 다녀가곤 한다. 이런 조용한 방문자를 부르는 별다른 용어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세컨데이 비지터’ 정도로 스스로 이름을 붙였다.
오래간만에 순재에게 연락이 왔다. “형님, 친한 사람들을 모시고 아티스트 토크를 하려고 하는데 오실 수 있나요? 오셔서 식사하고 가세요.” 보통은 청첩장을 주는 아이들이 밥 먹고 가라는 말을 하던데…. 저리 정중히 부르는데 안 갈 수 있나. 오사카에서 갤러리를 하고 있는 기찬이도 온다길래 바쁜 일정을 쪼개 시간을 내었다.

낯가릴 것 없는 테토남 외모지만, 의외로 수줍음이 많고 카메라 앞에만 서면 뚝딱거리는 순재는 그래도 지인들 앞에서 자기 작품에 대해서 열심히, 자기의 서툰 말로 풀어낸다. 2021년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베를린에서 머물고 있는 순재를 만났을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었다.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하고, 처음부터 페인터가 아닌 건축학을 배우다 회화로 넘어온 그는 자신의 색깔을 찾는 것을 하나의 소명처럼 생각하는 듯했다. 그 무렵, 순재는 우리 전통색인 오방색에서 그 해답을 찾고 있었는데, 지금은 오간색까지 확장하여 작업 영역을 넓히고, 그 사이에서 어느덧 전통과 현대를 잘 버무린 자신만의 색채를 찾아낸 듯하다.


그해 나는 프라하에서의 일정이 지연되어 아주 이른 새벽에 베를린에 도착했다. 우리는 보로스 컬렉션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른 시간인데도 마중 나온 순재는 테크노 클럽에서 밤을 새우며 나를 기다렸다고 했다. 우리는 함께 베를린 곳곳을 다니며 꽤 먼 거리를 걸었다.

특히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은 공항의 넓디넓은 활주로가 공원으로 바뀐 템펠호프를 함께 걷던 시간이다. 순재는 스피커로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꽹과리 소리와 우렁찬 노랫소리를 들으며 공원을 걸었다. 베를린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던 그는 좋아하는 테크노 음악과 사물놀이 사이에서도 자신이 무엇에 끌리는지, 앞으로 무엇을 해나갈지에 대한 답을 구하고 있었다. 귀국 후에도 느리지만 착실하게 자신만의 세계를 쌓아가는 그의 모습은 그때와 다르지 않다.
난트 매거진을 위해 순재와 인터뷰했을 때, 그는 나중에 축제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기획자인 나는 으레 페스티벌이나 아트페어 같은 행사를 떠올렸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다 보니 순재가 꿈꾸는 축제는 미술과 음악을 결합하고, 함께 작업하는 동료들과 종합적인 퍼포먼스를 펼치는 자리에 가까웠다. 그 구상에는 축제가 많은 일본에서 지낸 경험도 녹아 있는 듯했다.

아티스트 토크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한 작가의 작업을 좋아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인 만큼, 순재의 작업을 한층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좋은 작가란 오래도록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던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 덕분에 작품 활동을 계속할 수 있어 감사하다는 순재의 말을 들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마을 하나가 필요하듯, 좋은 작가 한 사람이 자신의 세계를 키워가는 데에도 곁을 지켜주는 좋은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물론 그 중심에는 묵묵히 작업을 이어가는 작가의 성실함이 있어야겠지만. 소걸음으로 천 리 가라!

좋은 자리를 마련해 준 TAA에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알고 보니 예전에 키아프 VIP 혜택으로 다이닝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도움을 주셨던 웍셔너리 대표님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요즘은 유튜브 ‘아재가 미래다’로도 유명해지셨다고 한다.
당시 키아프 VIP 혜택으로 소개하고도 정작 나는 가보지 못해 아쉬웠는데, 이제야 찾아와 보니 참 좋은 곳이었다. 편안한 분위기에 맛있는 음식, 합리적인 가격까지. 이미 줄 서서 찾는 맛집이라는데, 낮 시간에 아티스트 토크를 위해 공간을 내어주고 특별히 코스 요리까지 준비해 주셨다. 그때도 도움을 받고 이번에도 좋은 대접을 받았으니, 언젠가는 어떻게든 이 고마움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
2026.1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November 2026.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